메뉴 건너뛰기

알림마당

방명록

- 해당 게시판은 일반사용자 쓰기가 제한되어있습니다.
- 홈페이지에 탑재하고자하는 자료가 있으신 분은 관리자 메일로(master@mirokli.com) 내용 보내주시면
   확인 후 업로드 해드리겠습니다.

老年의 눈물

전 제물포고교 교장 이상용 2013.11.18 15:19 조회 수 : 5466

.....

 

 

나는 2013년 9월 13일 오후 4시에 서울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독일인이 사랑한 동양의 현인 이미륵 박사 추모 기념전”에 참가 초청을 받았다. 평소에 그를 높이 평가하고 남달리 존경하여 왔기 때문에 거기에 참석했다. 조금이라도 기념사업발전에 도움을 드리고자 축하금을 가지고 갔으나 접수하지 않아서 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김춘웅 회원님과 함께 가서 오후 3시 15분부터 4시까지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세 대목에서 충격적인 감동을 넘어 감격을 받아 많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간 사절단도 얼싸 안고 울었으며, 80% 이상의 독일 지성인들이 이미륵 박사의 죽음을 텔레비전의 시청을 통해서 보고울면서 아쉬워했다고 하여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대목은 1964년 12월 8일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 만찬장에서 서독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Ludwig Erhard, 1897~1977)>에게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을 먹여 살릴 돈을 빌려 주십시오. 빌린 돈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에르히르트 총리는 잠시동안 침묵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대통령의 손을 마주잡고, 회담 후 담보 없는 차관을 독일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를 빌리는데 성공한 박대통령은 사절단과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국제적 상업 차관이었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씨앗 돈이 되었다.

 

그런데 독일이 조건 없는 차관을 제공했던 신뢰의 배경에는 이미륵 박사가 있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거의 대부분 1920년 독일로 망명하여, 독일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를 저술한 한국인 이미륵을 알고 있었다. 종전 직후 발표된 그의 소설은 패전으로 절망적인 자존 상실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애독 되었고 독일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책의 일부 내용이 수록되기도 했다. 1964년 당시 차관을 얻기 위한 독일 행에 통역관으로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 박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소설“압록강은 흐른다”의 유산이 정신적 혼돈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그러한 독일인들의 도움이 최초의 차관으로 이어지고 이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둘째 대목은 작가 이미륵의 순수하고 고귀한 휴머니즘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독일인들의 가슴에 오롯이 남아있다. 이미륵이 남긴“인간미”와“따스함”은 독일 땅 구석구석에 변치 않은 채 절절이 배어있다. 그가 남긴 족적은 현지에서 친분을 나눈 지인들의 회고를 통해 드러난다.

 

먼저, 알프레드 자일러(Alfred Seyler, 1880-1950) 박사다. 뮌헨 판화박물관 관장이었던 그는 딸로부터 젊은 동양인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이미륵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자일러 박사는 한 눈에 낯선 동양인 청년 이미륵의 남다른 품위와 지성을 간파했다. 그의 가족들은 총명하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이 청년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천륜과도 같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또 다른 한 명은 민속학자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교수다. 이미륵은 후버 교수와 알게 된 후 인간의 육체와 영혼, 도덕적 윤리와 동양적 세계관에 대해 밤새도록 담론을 나누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그러나 후버 교수는 반나치 투쟁을 하다 1943년 7월 13일, 뮌헨의 슈타델하임(Stadel-heim)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후버 교수가 처형당한 뒤, 그의 많은 지인과 동료들은 후버가(家)의 사람들을 멀리했지만, 이미륵은 곤경에 처한 후버 교수의 가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들은 이미륵의 따뜻한 인정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

 

“백장미 사건 이후 모든 친지들과 지인들은 우리 가족을 멀리했어요 (중략) 그러나 누구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있던 이 박사는 자신이 안 먹고 싸온 음식과 보조금을 감옥에 계신 아버지에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요.”

- 후버 교수의딸 브리기테 바이스(Brigtitte Weiss) 의 증언에서-

 

셋째 대목은 1950년 3월 20일 병상의 이미륵은 하녀에게 물 한잔을 청했다. 그는 건네받은 차가운 물을 그대로 자신의 얼굴에다 뿌리고는 힘없이 침대에 쓰러지며 긴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통증으로 신음하는 그에게 주치의 페터 베크만(Peter Beckmann) 박사가 몰핀을 주사하자 곧 가쁜 숨이 잦아들고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짙은 어둠이 무겁게 드리운 초저녁(8시 20분 경)이었다. 그의 침상을 지켰던 자일러 부인과 가정부 리나(Lina) 그리고 제자, 에파 크라프트(Eva Kraft, 1923-2007)는 대한민국의‘애국가’를 합창하며 고독한 망명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1950년 3월 24일 푸른 봄날 고요한 그래펠핑(Grafelfing) 공원묘지에는 3백여 명의 독일인 조문객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관을 따랐다. 장엄하고 엄숙한 추모식이었다. 누군가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트로이메라이(Traumerei)’를 불렸다. 조문객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낯선 땅을 외롭게 떠돌던 한 영혼이 고향 압록강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식을 취하길 기도했다.

 

“존경하는 조문객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 모두 사랑했던 한 한국인의 묘소 앞에 서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정녕 비통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가 불굴의 용기와 부처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생을 지탱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르바나를 믿고 의지했으며 그가 내게 자주 말했듯이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천국을 믿었습니다.(중략) 그의 저서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듯이, 비록 그가 죽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흐를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사랑하는 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그가 영면하기를, 자유 속에서!”

- 안드레 엑카르트 (Andre Eckardt, 1884-1974) 교수의 추모사에서-

 

나는 인생의 참다운 의미와 목적 및 가치, 존재의 참다운 이유와 본분에 대해서 오랫동안 추구하고 모색하며, 사색하고 명상하며, 고심하고 방황해 왔다. 그러나 그 정답이나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규정을 밝혀내지 못했다. 사람들이 후회없이 살아가기 위한 생활의 가장 모범적이고 가치있는 기준이나 절차, 방법이나 내용은 무엇일까?

 

나는 50년 전에 보았던“세인”이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아란낫트’의 멋진 삶을 상기하며,“독일인이 사랑한 동양의 현인 이미륵박사 추모 기념전”을 관람하고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존재의 참다운 본분을 깊이 깨닫고 감격의 법열과 환희를 만끽하며 흐르는 눈물을 그치려고 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