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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 소설에 나타난 고향의식연구②

문학평론가. 부산문인협회 회장 정영자 2011.10.21 17:31 조회 수 : 6092

이미륵 소설에 나타난 고향의식연구

 

정영자 (문학평론가. 부산문인협회 회장)

 

2. 시대적 배경과 인간 이미륵

 

문학은 시대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며 문학 그 자체의 형태상의 전개와 문학 내면에 흐르는 사조, 또는 문학을 산출한 동기 등에 의한 문학의 전개를 고찰해야 한다.

봉건 세계의 몰락은 조선에서 내부적인 요인보다는 외부적인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땅의 역사는 자생적인 시민 계급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근대화의 과업을 식민지 열강들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작가가 태어난 1899년은 19 세기 후반으로 조선이 정치적, 역사적 격동기에 처해졌던 시기이다. 그 격동기의 불안과 격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고 맑은 필치로 조국의 힘없음과 아픔을 소리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적 약탈은 그들의 식민지 정책의 목표인 사회․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한국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있던 시대였다. 1910년 한국강점을 전환점으로 일본군과 일제 헌병경찰은 한국인을 식민지 노예로 전략시키면서 살육과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게 하였다.

갑오경장(1894)에서 1919. 3. 1운동 전까지는 ‘국권(國權)’과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개화기이며 중세적 봉건사회를 청산하고 근대사회로 지향하려는 문명개화의 의지와 민족적 역량으로 내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자주의지 등의 혼란기이다. 때문에 서구와 같은 근대에 대한 준비기간, 성장기간도 없이 자의에서가 아닌 강제적이고 타율적인 개화가 형성된다.

 

이미륵이 한국에 살았던 20살까지의 국내 상황은 격동의 중심이었고 그는 그 격동의 중심축을 벗어 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국외 탈출을 감행하며 끝내 자신의 의지적 목표지로 방향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독일도 우리와 사정은 비슷하였으며 지주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생활의 안정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 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23년 바이에른 당국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던 장소도 뮌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뮌헨은 남부 바이에른 최대의 도시이자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이자르강을 끼고 있다. 남알프스 산지와 북쪽 도나우강 사이의 고원지대 중앙에 위치하며 알프스산맥에서 발원한 이자르강이 시를 관류한다.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련군이 1939년 9월 18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였다고 본다.

1923년 11월 히틀러봉기가 일어나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1935년 뮌헨은<운동의 수도>로 선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정세가 전환되자 뮌헨대학에서는 반나치스 저항운동인 <백장미> 활동이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뮌헨의 반이 파괴되고 전후에는 미군의 점령 하에 놓였다.

일제의 탄압과 검거를 피하여 신문명을 찾아간 독일에서도 세계대전의 중심에 서서 망국민으로 이역만리에서 건강하지도 않은 몸으로 고결한 선비정신과 몸에 밴 인정주의적인 관습에서 이미륵의 고통은 남다르게 심하였을 것이다. 그가 역사의식과 전면적인 비판적인 공세로 글을 쓸 수 없이 회고적인 고향의식으로 담담하게 사물과 관습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술·문화의 중심지로 독일 최대의 종합대학인 뮌헨대학(1472년 창립, 1826년 뮌헨으로 이전)은 공과대학. 조형미술대학·음악대학 외에 국립도서관·바이에른 국립박물관·독일박물관(자연과학·공학)·국립극장·오페라극장 등이 있다.

천년의 도시, 수백 년의 건물 사이에서 여행 가이드는 20년 된 자신의 집은 새 건물이라고 소개한 2004.1. 5. 뮌헨여행을 생각하며 일행이 즐겁게 웃었던 기억을 떠 올린다.

금융·상업·공업·교통·통신·문화의 중심지며 식품가공, 정밀 광학기기, 전기제품, 화장품, 의류, 맥주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다. 또 영화 제작과 도서 출판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고국의 정치적 탄압의 불행 속에 몸을 던져 동조한 독립운동의 체험은 먼 이국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일은 살아서 일신의 안정된 의사로서의 직업보다 조국의 순박한 인정과 풍속을 유럽 땅에 알리고 그 소설적 이중 장치를 통하여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전략으로서의 글쓰기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본명은 의경(儀景).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1910년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독학으로 경성의전에 입학하였으며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반일 전단을 뿌리다 일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다. 임시정부의 일을 거들며 9개월 동안 상하이에 머물던 이미륵은 마르세유를 거쳐 1920년에 독일로 망명하였다. 뷔르츠부르크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47∼1949년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한국어 등을 강의하였다. 그는 전공분야에 종사하지 않고 곧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과 이야기들을 독일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면서 창작활동에 열중하였다. 1931년부터 창작활동을 시작, 동양의 전통적 정서와 서정을 섬세하고 담백하게 그려냄으로써 독일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19세기 초 한국의 유교적 정취와 풍토를 어린이의 눈을 통해 묘사한 자전적 성장소설 『압록강은 흐른다(1946)』 , 그밖에 「무던이」, 「실종자」, 「탈출기」,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등이 있다. 소설·수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문화·정치에 관한 글과 『한국어문법(1927)』 등을 남겼다. 1950년 3월 20일 위암이 악화되어 51세에 망명지 독일 뮌헨 교외의 그래펠핑에서 사망했다. 유고집으로 1974년 독일 에오스출판사가 간행한 중·단편집 『이야기』와 한국에서 출간된 중편집 『압록강에서 이자르강까지』(1982) 『이상한 사투리』(1984) 등이 있다.

 

이미륵은 고향 해주에서 1910년에 6세 연상인 최문호와 혼인하여 1917년에 아들을, 1919년에 딸을 낳았다고 정규화교수가 수록한 연보는 전하고 있다. 아들은 어릴 때 죽고 분단이후 딸의 생사나 후손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강용흘은 구겐하임 펠로십 기금으로 유럽을 여행하면서 ‘동양 선비 서양에 가다’를 집필했다. 유럽여행 길에 강용흘은 독일에서 후에 『압록강은 흐른다』(1946)를 펴낸 이미륵을 만났다. 이미륵은 강용흘의 가족을 위해 여름별장을 내주었다. 이미륵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에 나섰다가 상하이로 망명한 후 독일 의사의 양자로 독일에 와서 의학(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전공했으며 나중에 문학과 그림에 심취했다. 강용흘을 만났을 때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강용흘을 만난 이때가 이미륵이 작가로서의 영감을 받았던 시기라고 여러 자료는 밝히고 있다.

강용흘과 이미륵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외국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했다.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도 같았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장덕수, 이광수, 김구 등을 떠올리며 밤을 새워 토론도 했다. 강용흘은 이미륵을 통해 헤르만 헤세를 만났다. 강용흘과 이미륵은 나중에 파리를 함께 여행하고 이탈리아에도 함께 갔다는 사실이다.

논픽션의 글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겠다. 그러나 이미륵의 누나의 손자인

이영래(70)씨는 “이 박사 아들은 6·25 때 병사했고, 딸과 부인의 행방은 파악되지 않는다”고 했다.

 

1919년 가을. 한반도의 북쪽 압록강 나루터에서 한 젊은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인부들이 수풍댐 건설에 동원돼 공사를 하다 수시로 수몰되는 광경을 보면서… 당시 이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부는 3만 명. 이중 3000여명이 공사중 수장됐다.

그때 마침 서양(독일)의 한 신부가 지나가다 이 젊은이에게 우는 이유와 어딜 가는지 물었다. 신부는 독일에 오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주었다. 그 후 그는 조국의 아픔을 뒤로 한 채 때로는 기차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일행 배에 승선했다. 그는 서울을 떠난 지 석 달 스무날 만에 독일 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는 주소가 바뀌어 그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

 

 

 

1943년 독일 그레펠핑에 문화 단체를 조직한 이미륵 박사는 작품 발표회와 토론회를 통해 현지의 작가, 교수, 음악가, 화가, 의사, 언론인 등과 교류를 넓히기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된 것은 그로부터 약 3년 뒤인 1946년이다. 독일의 대표적 출판사 중 하나인 피퍼(Piper)출판사가 낸 이 책은 이미륵 박사의 다른 작품인 「무던이」, 「이야기」 등과 함께 “동양의 윤리를 기반으로 자연인을 추구했다”는 평을 얻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문학지 바이어리 슐레는 이미륵의 작품에 대해 “소박하고 포근한 언어로 가득 차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고 평했고, 작가 겸 미술사가인 하우젠슈타인은 “은연중에, 겸손하게, 그러면서도 심오하게 동서양의 대면을 자신 속에서 완성해 보려 했다”고 평했다.

독문학적인 성과는 독일인이 평가한 그들의 선호적 입장으로 이미 확고한 뿌리를 내렸으나 그의 독립운동에 관한 것은 이제 그 정리 단계에 와 있다.

상하이에서 체류하던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 박사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입해 편집부장으로 활약했다. 1919년 5월 결성된 이 단체는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한 독립단체다. 이 단체는 본부인 중앙부(中央部)를 서울에 두고, 국내 각처에 지부를 둔 뒤, 상하이에 해외 지부를 설치했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중앙부에 외교부, 재무부, 편집부, 외교원, 외교특파원 등을 두고 외교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이 박사는 이 단체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의 발간을 주도한다.

김종욱 세종대 교수는 2007년 3월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이란 논문을 냈다. 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미륵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한 후생단체인 ‘대한적십자회 십자대(十字隊)’의 회원과 ‘청년단 편집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김 교수는 일본 경찰이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와 1919년 11월 27일자 독립신문 보도 등을 근거로 이미륵 박사의 드러나지 않은 행적을 추가로 밝혔다.

이미륵박사가, 상하이에서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는 사실이 44년 만에 확인됐다. 1990년 12월 26일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이미 수여됐으며,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창고에서 17년간 훈장이 보관돼 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국가보훈처는 이에 대해 “이미륵 박사는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44년 전인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며 “이 표창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미륵 박사의 소설가로서의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나아가 이 박사가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44년 전에 포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미륵 박사의 직계 후손은 현재 국내에 없다. 따라서 이번 훈장은 이 박사 누나의 손자인 이영래씨가 유족을 대표해 받았다.

 

3·1운동에 참가한 이미륵 박사가 일본 경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넌 뒤 상하이를 거쳐 유럽으로 간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상하이에서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었다. 이 박사는 유럽으로 간 뒤에도 일본 측이 작성한 ‘요시찰 조선인 학생 33명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1927년 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회의’에 김법린·이극로·허헌 등과 함께 참가해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신음하는 조선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한국대표단은 대회에 <한국의 문제> 라는 자료는 이 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이 일본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던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 각국 대표에게 배포한 것이다.

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정규화(鄭奎和) 전 성신여대 교수는 “저명한 작가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던 이 박사의 새로운 면모가 밝혀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철저한 반일-반나치주의자였던 그가 전공과 달리 작품을 써 온 것은 한국을 유럽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에 반대했던 ‘백장미 사건’으로 처형당한 쿠르트 후버교수와는 절친한 친구로 이념적인 동지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언젠가 그는 영화관에서 일본군이 총을 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소리를 치며 퇴장한 후 다시는 영화를 보지 않았고, 고생스럽게 자일러교수집에 기거하면서도 히틀러에 반대하여 처형되기 전에 아무도 두려워서 찾아오기조차 꺼리던 후버교수집을 찾아와 곱게 싼 음식을 후버교수에게 가져다주라고 하던 인간애는 후버교수의 딸 바이스여사의 입을 통하여 증언되고 있다. 그가 위암으로 죽는 순간, 친구들이 이미륵에게서 배운 한국말로 애국가를 불러 주었다는 감동적인 후일담도 전해진다.

그를 알았던 독일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에 대한 일화는 그의 독특한 지성과 해학을 보여 준다. “현명하고 식견을 갖춘 친구, 높은 인격과 안목을 가진 사람,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 최종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으로 지칭되고 있다.

나치의 기세가 전 유럽에 등등하던 시절에 스웨덴을 여행하던 이미륵은 기차간에서 만난 독일인에게서 히틀러의 찬양을 한참이나 듣고 나서 히틀러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기가 막힌 독일인이 당신은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기에 위대한 히틀러도 모르냐는 질문에 이미륵이 서슴없이 나는 독일에서 왔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이미륵이 독일의 기차 안에서 만난 독일 노인과의 대화는 그의 번득이는 해학을 보여준다. 동양인 이미륵이 옆자리에 앉은 흑인과 독일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독일 노인이 '너희 나라말'로 대화해 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 독일어와 '너희 나라 말' 딱 두 개의 언어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 독일 촌부의 오만과 무지에 대해 이미륵은 이렇게 부드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말'에도 독일어처럼 사투리가 있는데 우리는 각기 다른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소통이 불가능해서 할 수 없이 독일어로 대화하는 거라고. 또한 그의 맑은 선비정신을 보여 주는 일화도 있다. 전쟁 직후에 이미륵이 목수에게서 나무상자를 맞추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이튿날 화폐개혁으로 인해 그 돈이 휴지가 되자 이미륵은 새 화폐로 상자 값을 다시 지불했다고 한다. 먹고 살기 힘들어 흉흉한 인심 속에 보기 드문 미담이 아닐 수 없다.

유고작 수필인 「이상한 사투리는」수필문학에서 작가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이게 한 주목되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한 정규화교수는 이미륵이 수필문학을 통해 추구 한 것은 "일종의 코스모폴리탄 적인 세계관 이었다"고 말하고 "동양권 사람이 다른 문화권과 만나는 데서 일어나는 오해를 유머러스하게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수필작품 대부분이 해학적인 요소를 다분히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의 문학은 낯선 이국땅에서 타향살이를 하며, 고단한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풀어낸 것이다.

이미륵 박사의 생애에 충격을 준 3가지 사건은 일본 침략과 망명, 나치출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놓은 병마였으나 그는 이것들을 자기 자신 속에서 극복하고 삶에 대한 봉사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독일 지식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았다고 정규화 교수는 밝혔다. 또 이미륵 박사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수많은 "휴머니스트의 면모"들중 몇 가지 일화들을 공개했다.

이 박사와 친했던 뮌스터대학 에른스트 보르네만 교수의 부인은 지난 72년 정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박사는 독일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을 걱정했고 귀국한 한국인의 여자 친구들까지 염려했으며 한국인과 사이에 아이를 낳은 독일 여성의 출산비용까지 지불했다"고 적고 있다.

전후 미국으로 이주한 이 박사의 친구 게오르크 가브리쳅스키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3년 집이 폭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였다. 그래서 집을 떠나려는 순간 이 박사가 집 앞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이 박사는 친구의 생사가 불안해 폭격을 무릅쓰고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집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가브리쳅스키는 생사의 위기 속에서 보여준 이미륵 박사의 우정에 감동, 그를 "나의 유일무이한 진정한 귀족"이라고 불렀다.

또 전후 식량배급 당시 가짜 배급표를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이 박사는 표를 받은 뒤 뒤늦게 배급표가 2장인 것을 알고 1장을 반납한 일도 있었다. 더욱이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훌륭한 일본인"이라고 수군댔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되돌아섰다고 그의 친구들은 전한다. 일본의 침략행위에 분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포용했던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던 경험을 살려 자신의 가까운 독일 친구들에게 한문을 가르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일의 ‘그레펠핑’ 지방에서 문화인 단체를 조직해 정기적인 발표회와 토론회를 가짐으로써 인적 토대를 넓혀갔다.

사진 촬영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독일의 여러 신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가 담긴 사진을 기고하는 등 낯선 동양의 문화를 전파하는데 온 힘을 쏟게 된다. 만년에 그는 뮌헨 대학 동양학부에서 한학과 학국어,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미륵은 독일로 건너간 뒤 작고할 때까지 19년 동안 그를 도와준 독지가인 자일러교수댁 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는데 뮌헨대학의 제자 에파 크라프트와의 열애는 그가 남긴 유명한 일화의 한 토막 이다. 에파는 이미륵으로부터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워 중국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로 이미륵이 말년에 사경을 헤매던 3개월 동안 대소변까지 받아 내면서 극진히 간호하였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뒤 한때 순사(殉死)했거나 수녀가 됐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자취를 감추고 살아온 그녀는 서베를린 쉴러가에 혼자 살면서 프러시아문화재단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가 정년 퇴직 후 정신건강 관계로 양로원에 입원(2000년)하고 2007 년 5월 9일에 작고하였다. “닥터 리, 그 분 참 친절하고 좋은 분이였지. 그럼, 물론이지, 책 쓰실 때 표현 방법도 의논 했고 교정도 해드렸지… 그렇지만 나는 애인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소문내는 것은 옳지 않아…”

독일인들에게 이미륵은 '위대한 한국의 아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전통이나 인간을 부정하거나 절망적인 태도로 관망하지 않았다.

이미륵 탄생 100주년 행사는 한 사람의 예술이 한 나라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자리이기도 했다. 그가 "독일인들에게 한국의 얼과 문화를 어떤 외교관보다 더 마음속 깊이 넣어준 사람"이란 평가를 받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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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김지현, 재미문학가‘초당’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 신동아 ,

   2004.12.01 통권 543호 (p624 ~ 654)

② 위크리조선, 2007.06.23

③ 위크리조선, 2007.06.23

④ 독일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위클리조선, 2007년 07월 03일

⑤ 가로 15cm, 세로 23cm 갱지에 인쇄된 원본이며, 표지에는 영어. 불어. 독어로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제목

   아래 원색의 태극기와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본문은 ’KOREA'라는 제목 아래 독일어와 영어로 각각 4페이지씩 1부터

   8페이지의 표시가 되어 있고, 앞뒤 안표지에는 일제 식민지 침탈 상을 나타낸 도표 2페이지가 있으며,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12페이지짜리로 베를린의 살라드룩 운트 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이 자료는 독일 뮌헨대학 생물학부 동물학과의 이미륵 동기동창생이었던 샬러(Schaller)교수가 이미륵에게서 받아 40여 년간

   간직해오다 1969년경 한국에서 유학 온 정규화 교수(성신여대, 독문학)에게 선사하여 1984년 7월 13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것이다. 이 문서의 표지 아랫단에 이미륵은 연필로 ‘Brussel 10 Feb 27"이라는 표기와 두 줄의 글을 독일어로 적고 Mirok이라는

   자신의 서명을 남겨 그의 체취가 이 자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의 문제]의 내용은 양 안표지에 1910년 이래 1926년까지의 식민지 침탈 상을 한국내 일인 이주자 수, 토지침탈,

   한국인의 생활고, 한일 지주의 자본비교, 학교교육 억압과 차별, 관료의 수와 대우 비교 등을 나타내었다.

   본문의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한국은 유사 이래 독립국이었으며, 고유한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2)1910년 8월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한국인은 끝없는 불행에 빠지게 되었다.

  3)일인의 이주는 50만으로 증가되고, 모든 기회와 산업상의 이익을 독점하여 한국인 한 가족의 연간 소득은 10파운드에 불과하게

    되었다.

  4)일본은 그들의 범죄적 활동을 감추기 위해 한국의 가장 나쁜 관습, 특수 개별적인 잘못을 일반화하여 국제사회에 선전하고,

    모든 개선은 일본인의 공으로 돌린다.

  5)학교 폐쇄, 일본어 강요, 신문과 책의 출판, 회사설립, 경제적 문화적 활동은 금지 또는 단속된다.

  6)일본의 지배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한국인은 잔인한 보복을 받고 있다.

  7)1919년 3월 1일 한국 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것은 최후의 단계이며, 우리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8)무력이나 기만으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투쟁만이 우리를 자유의 생명으로 인도할 마지막이자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자료는 일제하에서 이미륵을 비롯한 한국의 해외유학생들이 가진 우리 역사 문화에 대한 자부심,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적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활동하고자 했던 의지와 노력을 말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정은,

   한국독립 운동사 연구소 책임 연구원,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월간 독립기념관, 1999년 2월호,p. 18

⑥ 조선일보, 2007.03.20

⑦ 백경학, 인간의 향기를 잃지 않았던 편화주의자, 이미륵 홈페이지 참고

⑧ 위의 글 참고

⑨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7, p. 94

⑩ 이유랑, 이미륵의 묘소를 다녀와서, 2003.

⑪ 고 이미륵 박사 휴머니즘 재조명 부산 일보 1999.03.15

⑫ 나신하 기자, KBS : 2007.10.29

⑬ 정규화, 이미륵의 생애와 문학, 이미륵저 정규화 옮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범우사, 1992. p.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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