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알림마당

방명록

- 해당 게시판은 일반사용자 쓰기가 제한되어있습니다.
- 홈페이지에 탑재하고자하는 자료가 있으신 분은 관리자 메일로(master@mirokli.com) 내용 보내주시면
   확인 후 업로드 해드리겠습니다.

http://web.chungbuk.ac.kr/~whan86 에서 펌
-------------------------------------------------------------
1. 이미륵의 외로움을 만나러 갔다가 이미륵의 바람을 맞고 오다.

이미륵 선생님, 선생님의 고독을 어찌 알겠습니까. 일찌기 선생님께서 사랑하시던 송림포구를 떠나와 히틀러의 독일에 역겨워하시던 때까지.

이미륵은 외로움이다 - 와 같은 은유를 그려본다.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다시 - 이미륵은 그리움이다 - 와 같은 은유를 그려본다. 정녕 그럴까. 생각이 모자랐음을 감지하는 이미륵의 후배는 - 그리움은 외로움이다 - 와 같은 비유를 다시 하나 그려본다.
비유의 순간, 이미륵의 후배임을 자처하는 그는, 비유의 원리를 어설프게 설명하던 중학교 3때의 국어선생님을, (아니 선생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봉건적 예의를 배반하다니--)를 떠올리면서 이미륵은 식민지 조선의 외로움이다라고 은유를 직설로 고쳐 써 본다.
이미륵,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는 외로워 저 노이에스 라트하우스(신시청사)를 배회하며 뢰벤부로이 맥주에 외로움을 식히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동양의 학문을 아리안족에게 알리려는 힘겨운 사투를 식히려고 여기 맥주를 마시러 왔을 것이다. 동양에서온 미륵처럼 이미륵 그는 외로움을 슈바빙의 안개로 식혔을 것이다.
뮌헨의 <외로운 포구 송림 마을> - 이십여년 전에 읽었던 이미륵 선생님의 글 <외로운 포구 송림 마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미륵이 살았고 전혜린이 살았으며 그 때문에 전혜린의 안개로 다가오는 뮌헨.
나는 뮌헨에 가기 위해서 「압록강은 흐른다」를 다시 꺼내 들었다.
전혜린 역 이미륵 작. 정신없이 <외로운 포구 송림 마을>을 무엇이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일깨웠을까를 보고자.

농부들은 집집마다 좋은 낚시 도구가 있었지만 낚시질을 하지 않고 어망으로만 생선을 잡았다.
그들은 만 밖에서 소위 '큰소'라고 부르는 근처에 어망을 쳤다.
그 어획물은 조그마한 공미리가 아니고 가자미와 넙치, 준치 또는 길고 긴 갈치 그런 큰 생선들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물을 치며 또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는 그물을 치러 가자는 권고에 거절하기 않고 즐겨 따라 나섰다.
마을 사람들은 밤의 썰물이 일 때를 골랐기 때문에 내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밤에 제일 좋은 고기가 그물에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이 대목, 아니 꼭 이 대목만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만.
아마도 이미륵 선생님께서 가장 그리웠던 대목 중의 하나일 터였다. 알프스가 북으로 끝나는 자락, 뮌헨의 이국에서 언스트 카시러가 말한 '찬란한 과거'를 그는 먹고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송림포구에도 갈 수 없고 이미륵 선생님의 그리움에도 갈 수 없다.

수암은 베게를 여러 개 쌓아 올려서 장농에 올라가려고 하였다. 나는 밑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도와 주었다.
그는 몇 번이고 나둥그러졌다.
한국의 베개는 평평하지를 못하고 길고 둥글기만 해서 딛고 오르기에는 무척 힘 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종내 그만두지를 않고 결국 장농 위로 올라갔다.(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중에서)

2. 전혜린의 안개

누가 70년대의 그 안개를 지나오면서 전선생님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지 않았겠습니까. 지금까지 바이에른의 관념적 감수성(이런 용어가 성립할지 모르겠는데)을 한국에 뿌려준 선생님을 읽고 유신의 안개를 헤쳐가려던 관념적 혁명가들이 있었겠지요. 그랬더랬습니다.
우리는 안개를 걷어낼 자신이 없어 늘 안개속을 헤메어야 했는데 「무진기행」의 현실적 안개보다 칸트의 안개를 찾아 「그리고--」를 읽었더랬습니다. 그 안개의 늪은 결국 궁정동 총구에 낀 연기로 걷혀졌고, 다시 정체 모를 안개로 대치되기까지 늘 「그리고--」는 유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를 남기고 역사의 <그리고> 속으로 사라진 전선생님. 선생님의 절망이 어느 깊이에 가 닿았는지 <그리고>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그 찬란한 역설 속에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계신 이미륵의 후배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사라질 수도 없는 이즈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어 늘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군상(群像)들로 세상은 가여워졌습니다.
이것이 내가 슈바빙에 서성거리게 된 까닭이겠지요. 저는 안개와 같은 역사를 헤집고 헤집으며 낮게 깔린 슈바빙을 찾아 떠나고 또 떠났겠지요.
한국을 우리라고 쓰지 않고 한국으로 객관화시켜야 하는 현실을 찾아서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아닌 한국은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적어도 안개 속에서 바라보아야 겨우 그림이 그려질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전선생님의 「그리고--」가 얼마나 낭만적이었던가는 선생님 자신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뉘 「소녀의 기도」를 거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진실이고 「그리고--」 역시 역사적 허구였는지 몰라도 현실적 진실이었던 것 아닐까요.
현실적 진실과 낭만적 거리는 1960년대 선생님의 뮨헨과 1990년대 저의 뮨헨을 갈라 놓았겠지요. 그것은 안개였습니다. 안개처럼 탁탁한 1970년대를 지나면서 수학시간에 저는 「그리고--」를 읽었더랬습니다. 그 감수성을 뮨헨이라는 이국을 통해서 배웠었지요.
당신이 흩뿌려둔 안개의 길을 따라서 저는 또는 한국은 객관적 한국을, 그러니까 3인칭 한국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륵의 압록강을 통해서 말입니다.
존경의 표시로 정성어린 번역을 해두었을 때만해도 명민한 어느 유학생의 감각적 사치가 아닐까 의심했었지요. 얼마나 우리가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밖에는 알지 못했던가를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한국이 세계사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위에 쓴 종형 수암에 관한 회상의 한국이란 어휘는 역자이신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미륵선생님이 한국(아마도 조선이었을 텐데)을 존재시키기 위해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토속적 감수성이 어떻게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예일 것입니다.
이제는 너무나 너무나도 상투적이 되어버린 문장, 그래서 오히려 전혀 의미를 가지지 않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의 고전적인 명제가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선생님의 그 외로움은 자신을 던짐으로써 자신을 얻는 가장 적확한 행위 - 자살로 끝났지만 선생님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선생님이 아꼈던 동생 전채린씨는 지금 원시의 안개를 찾아 먼먼 항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며 오늘 이만 줄입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