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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이미륵상 수상자 인사말

최정호 2003.12.01 15:37 조회 수 : 13886

- 수상자 인사말 -



이 미륵 상을 주관하시는 한 독 협회 허 영섭 회장님,

Michael Geier 주한 독일 대사님,

과분한 공적 소개를 해주신 독일 문화 원장 우베 슈멜터 박사,

그리고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금년 초 저는 뮌혠의 바이에른 예술원 (Bayerische Akademie der Schönen Künste)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그곳의 부원장으로 있는 시인 Albert von Schirnding씨가 방문 기념으로 책을 한 권 선물하려고 했으나 저는 사양했습니다. 그 책은 이 미륵의 소설 “Der Yalu fließt”였습니다. 사양한 까닭은 그 책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년 말 이번에는 한 독 협회에서 저에게 이 미륵 상을 주신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번에도 사양해야 마땅하다 하겠으나 이 미륵의 책은 안받고 이 미륵 상은 받겠다고 이 자리에 나 온 제 뻔뻔한 모습이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이 미륵은 독일을 한국에 소개했다기보다 한국의 삶과 그 문화를 처음으로 독일어로 소설을 써서 독일 및 유럽에 소개한 작가였습니다. 저에 앞서 지난번 이 상을 수상한 김 민 교수도 독일 음악을 한국에 소개한 이상으로 그의 바록크 실내 악단의 해외 연주를 통해 한국을 독일 및 유럽에 소개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일을 한국에 알리는 일에는 다소 관여한 바가 있으나 한국을 독일에 알리는 일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륵 상을 받겠다고 나선 것은 상을 받는 것이 그냥 좋아서 입니다. 그처럼 저는 속이 없는(eitel) 사람입니다.

위대한 괴테는 그의 나이 50대에 이미 모든 것을 도통한 사람답게 “Vanitas! Vanitatum Vanitas!”(허무하다, 허무하고도 허무하다!)라는 시를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이가 70이 되어도 아직 상을 타는 기쁨에 속 없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속담엔 나이 들어 속을 차리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이 없어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만은 마십시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무 공적도 없이 이런 상을 타게도 되니 말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히 많은 독일 사람들에게도 오래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구나 하고 실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1989년 11월 저는 베를린 장벽이 뚫릴 때 우연히 대학의 안식년으로 그 현장에 가있었습니다. 1961년 8월 장벽이 구축될 때 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 전 수상이 장벽이 무너진 바로 그 다음날 (11월 10일) 옛 서 베를린 시청 앞 존 F 케네디 광장에서 다음과 같은 감개 무량의 연설을 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원래 하나인 것은 자라서 다시 하나가 된다. 유럽의 갈라진 부분이 자라서 하나가 되는 것을, 내가 살아서 같이 체험할 수 있다니, 나는 그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Jetzt wächst zusammen, was zusammengehört. Jetzt erleben wir und ich bin dem Herrgott dankbar dafür, dass ich dies miterleben darf: die Teile Europas wachsen zusammen).

실은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구축될 때 저도 한국 신문의 특파원으로 현장에 가있었습니다. 그 후 독일에서 지낸 60년대의 전 기간을 저는 베를린에서 장벽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저는 제 생애가 끝날 때까지 장벽 없는 베를린, 다시 하나가 된 베를린을 체험하게 되리라고는 기대조차 못했습니다. 따라서 1989년 가을 우연히 독일을 방문 중에 11월 9일을 같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도 매우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역시 오래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 그때도 생각했습니다.

장벽에 갇혀 지낸 저의 서 베를린 시절, 장벽과 더불어 살아야 했던 통일 이전의 저의 서독 체재 시절이 그렇대서 반듯이 불행한 것이었냐 하면 저는 그렇지 만은 않다고 대답하렵니다. 물론 그 시절은 저의 젊은 시절이었다는 사사로운 이유도 있겠습니다. 만은 그보다도 통일 후의 오늘날 되돌아 볼 때, 그리고 독일 역사의 총체적 맥락에서 전망해 볼 때, 1949년부터 1989년까지의 독일 연방 공화국의 40년은 국내 정치적 및 대외 관계적으로, 경제적 및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 및 특히 도의적으로 그 모든 차원에서 가장 훌륭한 성취를 보여 준 황금기가 아니었나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2차 대전 후 서독의 40년은 이 미륵이 독일에서 살았던 1920년에서 1950년까지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제3제국 시절 그리고 그의 몰락 과정으로 이어지는 30년과 비교해본다면 더더욱 그 명암(明暗)이 뚜렷해지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토를 달고 싶은 사실은 있습니다. 한국인이 외국 유학을 간다고 할 때 독일에 간다는 것은 이 미륵의 시대에는 거의 자명한 사실에 속했습니다. 선진 학문을 하러 간다면 독일에 간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 때는 이 땅의 모든 병원에서 “바이타민”이 아니라 “비타민”이라 했고 일반 시민도 “에너지”라면 못 알아 들어도 “에네르기”라면 알아 듣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이후 우리들 세대가 유학을 떠날 때는 이미 독일에 간다는 것이 이 미륵의 시대처럼 자명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제 독일이 아니라 미국으로 가는 것이 유행이오, 대세가 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독일 문학이나 음악을 전공하는 경우는 여전히 독일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 밖의 인문 과학, 사회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하필이면 독일에 간다? 그것은 이미 예전처럼 자명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특별한 동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혹은 인간 존재 실존 해명을 위해, 혹은 “사회적” 시장 경제 체제를 연구하기 위해, 혹은 “비판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혹은 “대륙 법”체계를 연찬하기 위해, 혹은 분단 국가의 제 문제를 비교 고찰하기 위해 등등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였으나 어떻던 저마다 시대의 유행이나 대세를 거슬러 꼭 독일에 가야겠다는 뚜렷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전후의 두 초강대국 미소(美蘇) 냉전이 한창이던 그 시절 Max Weber의 말을 빌리자면 러시아의 관료주의적 규제와 앵글로색손 사회의 인습 사이에서 유럽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 이 두 세력에 의해서 전 세계가 범람되는 것에 저항한다는 것(die Erhaltung europäischer Kultur zwischen der Reglements russischer Beamten einerseits und den Konventionen der angelsächsischen society andererseits … uns der Überschwemmung der ganzen Welt durch jene beiden Mächte entgegenzuwerfen)… 그것을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전후에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난 독일 연방 공화국과 그의 문화에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우리들은 시대의 유행과 대세를 거슬러 계속 독일에 갔던 것 입니다. 그러고 1989년, 전쟁을 통해서 위로부터 철혈(鐵血)재상이 통일을 성취한 19세기와는 달리, 밑으로부터 국민(das Volk)의 힘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성취한 독일 연방 공화국은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 독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에 독일과 독일 문화에 대한 저의 사사로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소설가로서 이 미륵은 그러한 사랑을 독일 사람들에게 한국의 “얘기”를 해 줌으로써 실천했습니다만 저는 언론인으로서 그러한 사랑을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의 현대사 (Zeitgeschichte)를 알려 줌으로써 실천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독일에 대한 제 사랑은 한국에서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한국 전쟁의 와중에 이미 싹터있었습니다. 이미 50년 전의 옛날입니다. 저는 그때 독일의 두 작가에 대한 사랑에서 지금도 쓰고 있는 “何異哉”라고 하는 제 아호(雅號)를 만들었습니다. “하이재”의 음(音)은 독일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뮌헨의 소설가 Paul von Heyse에서 따왔고 “무엇이 다르리오?”라는 그 의미는 괴테의 다음 시 구절을 한자(漢字)로 옮긴 것입니다;

그대 남들과 얼마나 다르리오

자신을 알고 세상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렸다.

Wie viel bist du von anderen unterschieden?

Erkenne dich, leb’ mit der Welt in Frieden!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괴테를 인용해야 되겠습니다. 많은 독일 친구들은 한국에서 술을 권할 때 “축배!” 또는 “건배!”란 말을 “Zum Wohl!” “Prost!”처럼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 친구들이 그렇게 가르쳐 준 듯싶습니다마는 그런 말은 원래 없었고 한국 친구들 사이에선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한국인들이 술을 권할 때엔 그저 “자. 듭시다!”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오랜 관례입니다. 괴테의 시에는 바로 이 “자, 듭시다!”를 라틴어로 적은 시 제목이 있습니다:

“Ergo bibamus!”

한 독 수교 120년을 축하하고 두 나라 관계의 보다 밝고 생산적인 미래를 위하여 저도 술 한잔을 권하고 싶습니다

Ergo bibamus!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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