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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 할아버지의 등산로를 짚으며.

유족.이영래 2004.09.17 09:43 조회 수 : 6632

이미륵 할아버지의 등산로를 짚으며. 

2004년 8월20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 뮌헨에 도착한 나는 다음날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하고 바로 오스트리아를 향해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자동차로 약 2시간여 후에 힌터리스 지역까지 달렸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그 숙소는 처음에 우체국 이였다 해서 Gasthof zur Post(www.post-hinterriss.at Tel;0043-5245206) 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숙박료는 1인당 아침 식사를 포함하여 26유로(약36.000원)를 받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아서 걱정을 했다. 비가 계속 뿌려댔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좋아지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1999년 8월호 월간 <山 >지를 들추면 172 페이지에 이미륵박사의 산행에 대한 기사가 보인다. 마야라고 불리는 여인(스웨덴으로 망명한 친구 베너씨의 부인)에게 보낸 글과 그의 일기를 그리고 그분이 오르고 내리던 알프스의산행과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 전 한국산악연맹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성진 씨의 특별 기고이다.  

이미륵박사는 누구인가? 그분의 본명은 이의경(李儀景)으로 1899년 3월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50년 3월 이역 독일에서 51세로 삶을 마감 하셨다. 경성 의전 3학년때 1919년 3ㆍ1운동에 가담,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몸을 피하고 1년 후 중국여권을 구해 배에 몸을 싣고 2개월여에 걸쳐 유럽에 도착, 독일에 들어서서 학업을 계속 하신다. 학업 도중 의학전공을 동물학으로 바꾸고 유학 7년 만인 1928년에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전공과는 다르게 글쓰기에 몰입하신다.
1946년 자전적(自傳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 그해에 독일에서 가장 빼어난 글로 뽑히고 이어 여러 가지 작품을 발표, 독일 문단에서 활약하셨으며, 대학교단에서 동양학, 특히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강의 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위의 이웃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자랑스러운 한국의 아들이었다. “나에게 그런 친구를 준 신(神)에게 감사 한다”. “인간 중에 인간이다”. “내가 펴낸 책들 중에 가장 훌륭한 책중의 책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글은 쓸 수 없다”. “정말로 진지(眞摯)한 분이다”. “유머스럽고 따뜻한 품성을 지닌 분이다” 등등의 칭송을 받았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발췌문이 독일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2003년도부터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6-2 국어 읽기에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문단이 실려서 앞으로는 온 국민이 할아버지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팔켄산장(1848M www.falkenhuette.at Tel;0043-5245245)의 침실은 난방이 되지 않아 낮보다는 싸늘했다. 그러나 모포 석장을 깔고 덮으니 곧 체온으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막다른길 끝 “엥”(Eng)이라 불리는 지점(1190M)에서는 3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다. 카르벤델(Karwendel Gebirge www.karwendeltour.de)산군(山群)계곡 중 이지점에서 시작되는 등산로가 많아 “엥”에는 숙박 시설이며 널찍한 주차장이 있었다. 어디서부터 오가는지 자전거를 타는 삼삼오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등산객들이 산장에 오르는 등산로에도 산악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기도 한다. 초등학생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미소 지으며 내려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파란 물감을 뿌린 듯하다 하늘에 하야디 하얀 구름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니 땀도 별로 나질 않았다. 일행 중에는 뮌헨에서 아시아식품점(49-089-531906)을 운영하시는 송준근 사장님을 비롯 6명이 나섰다. 송사장님은 할아버지 추모제를 주관하시기도 하고, 그곳 교민과 2세들에게 우리 조상 중에 이렇듯 훌륭한 분이 계셨음을 알리시는데 많은 정성을 쏟으시는 분이다. 독자 중에 이미륵박사 묘소에 관해 문의하신 분은 전화를 주시면 친절히 안내 할 것이다.

64년 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할아버지는 때때로 이곳을 오르셨다. 그분의 일기를 보노라면 3일째 “비가 억수로 퍼붓는 바람에 팔켄산장에서 자고”. 6일째 “자전거로 슈타른베르크를 경유하여 그래펠핑으로”. 7일째 “몹시 피곤해요”라고 적었다. 1940. 8. 26.이라고 날짜가 보인다.
나는 왜, 어떻게 이곳 산장에 와서 누워있는가?
이미륵 박사는 나의 외가 쪽 할아버지가 되신다. 어머니의 외삼촌, 외할머니의 동생이 되신다. 이미륵박사 기념 사업회(회장 정규화(鄭奎和)박사. www.mirokli.com. 032-815-1950)의 부회장, 유족대표이다. 정 회장께서는 독일 뮌헨에서 유학중 이미륵 박사의 행적을 찾아 많은 수고를 하시고, 30여 년간 수집한 자료를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기증, 후학(後學)과 일반인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 자료 중에 등산관계 부분을 김성진 씨가 <山>지에 특별 기고를 하시고. 이 내용을 읽은 산우 장동일 씨가 <山>지를 나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나는 독일어는 전혀 모른다.

2000년 추모제때 뮌헨을 방문한 김에 남쪽에 있는 알프스 산맥 중, 독일에서 가장 높다는 Zugspitze(2964M)를 기차로, 궤도열차로, 거의 수직으로 운행하는 케이블카로 올랐다. 그날 산장은 흐린 날씨와 건물 중턱까지 쌓인 눈으로 밖을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희뿌연 사이로 불쑥 불쑥 나타나는 스키어들의 세상이다. 이곳 매점에서 기념으로 썬그래스와 스틱 하나를 샀다. 시중 가격과 비교하면 차이가 별로 없다. 식사비도 비교적 쌌다. 누군가 그랬다. “그런 곳이 선진국이다”라고.. 사실이지 우리네는 너무하다. 보통 2-3배는 받으니까.. 이곳 정상이 나와 있는 지도 한 매(WK322 1/50,000)를 구 하고, 집에 돌아와 그분의 산행 기록 중에 나와 있는 지명을 찾았다. 한참 만에 찾은 곳이 팔켄산장이고, 주변의 지명을 하나하나 짚었다. 언제이고 가리라 했는데 하루를 묵으셨다는 그 산장에 나는 와 있다. 많은 눈 때문에 6-10월 기간만 산장은 개방된다. 
 팔켈산장 바로 윗 지점의 샘물이 많이 흐르는 라디즈코프(Ladizkopf 1921M)를 통과 가파르고 험한 만코프(Mankopf 2094M) 까지 갔다. 산장에서 1시간 거리다. 정상에는 십자가가 서있고  악천후에도 적을 수 있도록 철제함안에 방명록을 넣어 두었다. 대한민국에서 온 이영래가 이곳을 다녀가노라고 썼다. 그런데 디카로 찍은 것을 보니 실수로 년도가 잘못 적혔다. 후에 어느 분이 그곳에 가실 때 나에게 연락 좀 주시면 어느 부분인지를 알려드려야 하겠다. 주위는 온통 산. 산. 산뿐이다. 아래쪽은 파랗고 산봉우리는 회색 천을 두르고 있다. 만코프 주위의 산은 1500-2700M 정도의 산으로 장관을 이룬다. 산장으로 하산 하다 보니 산장을 둘러싸고 있는 랄리더러(Laliderer-spitze. 2588M) 북벽이 또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암벽 밑 부분에는 드문드문 만년설이 곧 미끄러져 내릴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저러다가 9월경에 내린다는 눈이 그 위에 다시 덮히겠지...석양이 팔켄산장을 빛나게 하고 있다.                       

잠결에 들리는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다. 혹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아닐까? 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세찬 바람이 침실을 휩쓴다. 그러자 누군가가 곧 창문을 닫는다.  

일찍 일어난 우리 팀은 새벽의 장관을 구경하려고 조용 조용 걸어 밖으로 나선다. 1921-1923년에 걸쳐 지은 이 산장은 삐걱대는 소리 하나 없다. 바람소리에 놀란 것과는 다르게 조용한 새벽이다. 혼자서 어제 갔던 라디즈코프 쪽으로 올랐다. 64년 전 할아버지는 만코프 옆길을 돌아 북진하는 산행을 하셨다. 나는 그분이 가신 쪽에 대고 큰 절을 하고 내려 왔다. 이번 산행에서 우리는 그분의 필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1940년도의 방명록을 보고 우리는 와-하고 소리를 냈다. 두 번 세 번 훑어보고 또 보았으나 Li라는 성은 두 번 나왔으나 Mirok Li는 안보였다. 비가 억수로 내리고 해서 마음이 상하셨을까? 방명록을 못 보셨을까? 펜이 불어졌거나 잉크가 떨어졌을까?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장동일 씨는 일행 중에 누가 대표로 했을는지 모른다고 위로해 주었다. 

팔켄산장에서 조식을 마치고 10시에 하산을 시작 했다. 15분쯤 내려가다 엥방향이 아니고 왼쪽 길로 내려서면 경관이 좋은 하산길이 나온다. 랠리더계곡(Lalider Tal)으로 이어진다.  통나무로 지은 별장 같은 집이 여러 채가 보인다. 가족단위의 휴양객들이 쉬기에 적당한 곳인 듯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놀고 있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비포장도로이지만 일반 차량은 통행이 안 된다. 이런 도로를 이용해 산악자전거가 팔켄산장까지 오른다. 할아버지의 등산시대에는 산악자전거가 없었으니 도보로 밖에는 산행이 안 되었을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는 2시간 반이 걸렸다. 길에 내려서자마자 지나는 차에 손을 들어 동승을 청하자 급정차를 하더니 차에서 내려 웃음 지며 어서 타라고 한다. 아니였으면 따가운 햇살 속에 지친 다리로 1시간 반은 족히 걸릴 주차시킨 엥까지의 도로를 15분 만에 왔다. 독어에 능한 이유랑(KOTRA근무)씨가 고맙다하며 대화를 나누더니 부부는 보스니아 출신이라 한다. 대체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부부였다.

짧은 1박의 산행이었지만 감회가 깊고 흡족 했다. 우선 날씨가 좋았고, 할아버지께서 밟았던 발자국을 따라 오른 것도 고마웠다. 일행 중 초등자도 힘은 들었겠지만 무사히 마쳤다. 고향에서 온 우리를 그분께서 보살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도 해 본다. 남으로는 키나바루(4,095M),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길을 잃어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구조대를 만나 생환하더니, 킬리만자로 정상을 앞두고 4,700M지점에서 고소증으로 인해 들것에 실려 다리품도 안 팔고 하산하기도 했다. 가야 할 산들은 많지만 할아버지의 발자국을 하나 하나 짚어가는 산행을 꿈꾼다. 꿈은 이루어질 것 인가?





64년 전의 등산장비는 어떠했을까? 물론 지금 같은 기능성 제품은 없었을 것이고 면, 모직, 가죽 그리고 고무로 만든 우비 등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등산객들이 지금의 장비를 볼 수 있고, 쓸 수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일까? 부질없는 궁상을 떨지만 그 시절의 산악인들 혼(魂)에게 입혀드리고 싶기도 하다. 그분은 새 등산화를 구한 후 다시산행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쓰시던 등산화가 아마도 많이 헐었던가 보다.
할아버지 잘 다녀왔습니다. 훗날은 언제가 될는지 기약은 못합니다만, 지도를 펴고 다녀오신 자리를 짚어 머리에 넣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명복을 비옵니다.
 
이영래  (주)삼화제작소 근무.  www.samhwamix.com
E-mail : yrlee@samhwamix.com
TEL : 011 - 259 - 8382
       
힌더리스(Hinterriss)에는 엥방향으로 좌측에 좋은 숙소가 있어 소개한다. 1박을 했다.
상호 : Gasthof zur Post 
e-mail : post.hinterriss@nextra.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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