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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화첩기행] 이미륵과 뮌헨-그래펠핑 (2) | 김병종의[화첩기행] 2004/08/13 02:31
 http://blog.naver.com/roadtou1/140004889203

묘소는 돌아가지 못한 고국쪽을 향하고

방하착. 그래펠핑 묘원의 낙엽이 분분하다. 붙잡으려 하지 마라. 소용없는 일이야. 지는 잎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네 삶도 그렇게 가는 것이야. 아름다운 석물들과 꽃에 뒤덮여 있지만 묘원의 슬픔은 그래서 더 선명하다. 이미륵의 묘소는 오랫동안 찾는 이 없이 이 묘원의 응달지고 습기찬 한쪽에 방치되어 있다시피했다. 이제는 조국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이장해서 이처럼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까지에는 많은 이들의 수고와 애통이 있었다.

1972년 당시 30대의 늦깎이 유학생 정규화는 시한에 쫓기던 독문학 박사학위 논문을 밀쳐두고 관리비를 내지 않아 폐묘될 위기에 있던 이 박사 묘지 살리기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의선, 의정 두 누님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지만 마음뿐 속수무책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분노했다. '국가'나 '당국'은 이미륵에 대해 어쩌면 그리도 무심할 수 있었더란 말인가.




사진설명 :

뮌헨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이다. 이미륵이 그토록 문명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뮌헨은 또한 꽃의 도시이기도 하다. 한 꽃가게 앞에서의 즉흥이다.


"이미륵이 누구야? 미륵이 절에 있지 않고 왜 독일에 가 있어?". 1965년 뮌헨대학 뒷길 한 고서점에서 시작된 정규화의 이미륵 기리기는 실로 거룩한 데가 있다. 『이박사의 혼백이 나를 이끌고 다녔음이 분명합니다. 「미륵리 게젤샤프트(독일인들의 이미륵 추모회)」 회원들을 비롯, 프랑스와 벨기에 미국과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실로 수많은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뜻밖의 장소, 의외의 인물들에게서 이미륵의 유고와 자료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나는 그이의 혼백이 나를 또 이곳에 이끌고 왔구나 느끼곤 했지요.』.

정규화는 이미륵이 우리 근대사의 가장 걸출한 인물의 하나라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는 실로 전무후무할 정도의 복합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독일 저명신문에 「압록강…」 서평만도 1백회 이상이 실렸지요. 영-불- 독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나가면서 「압록강…」은 펄벅의 「대지」가 중국을 알린 것 못지 않게 한국을 드러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듯 독일로 가서 망명자 신분으로 살면서도 벨기에의 피압박 민족대회에까지 참석하여 직접 태극기를 그리고 일본의 죄악상을 알리기도 했을 만큼 애국지사이기도 했습니다. 이학박사였지만 서예와 한시에도 일가를 이룬 분이었지요.』.

언젠가 서울대학교 독문과 박환덕 교수댁에 갔다가 휘갈겨 쓴 그의 자작 한시를 본 적이 있었다. 10대에 조혼했다가 두고 떠나온 아내에게 쓴 회한의 시였다. 한때 애타게 그리워했지만 부부 인연이 다해 이별할 수 밖에 없었음을 토로한 눈물겨운 내용이었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조선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그 서예의 골기 또한 빼어난 것이었다.

그의 무덤에 가기 전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알약을 두 알 삼키고 보니 약병에는 한 알 이상은 먹지 말라고, 영문으로 씌어 있었다. 눈앞에 푸른 밤안개의 강이 펼쳐져 있었다. 압록강이라고 했다. 밤안개 속을 건너가는 한 청년이 보였다. 검은 두루마기의 그가

나를 돌아다본다. 귀골풍의 단아한 미남자였다. 참 잘생긴 얼굴이구나, 정신이 살아 있어, 요새 저런 얼굴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짧은 꿈치고는 너무도 생생했다.

이미륵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독일유학생 전혜린과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고 김재원 박사 등의 간헐적인 신문 잡지 기고를 통해서였다. 그외에 간혹 그를 연모했던 독일여인들 이야기나 30년 세월 그를 후원했던 자일러(Seyler)가 사람들 얘기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특히 1949년 11월 위암 수술을 받고 요양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대소변을 받아냈다는 에파 이야기나 이미륵이 지상에서 남긴 마지막 편지 「힐게 볼모르트에게」(고서점 주인이었던 그녀는 1997년 유언대로 이미륵 묘소 바로 뒤에 묻혔다)는 가슴을 친다.

아직도 베일에 싸인 이미륵. 맑고 곧은 조선의 선비정신을 독일에 심고 떠난 그의 압록강 건너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끝).

● 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지난 11월 7일 오후 2시, 성신여대에서는 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발기인 총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정규화 회장과 신채식 박사, 후손 이영래 씨 등이 모여 탄신 100주년이 되는 내년 봄 독일과 한국에서 기념전시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그간 정 박사가 모았던 유고와 사진, 편지 등 300여 점의 자료들은 94년 이후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7층의 고전운영실 「이미륵 문고」에 수장되어있고 운영실의 이귀원 박사가 관리책임을 맡고 있다.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는 최근 범우사에서 중간되었다.

( 글-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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