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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 文의 향기 2004/07/14 02:41
http://blog.naver.com/aura20/60004029254
 

스터디를 통해 알게 된 이 작품과 작가는 내게 시원한 물줄기를 선사해 주었다. 이 글이 문학교과서에 실릴 만큼, 그리고 재출간될 만큼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고 우리의 민족성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 것 같다. 아직 제대로 읽지 못했다. 꼭 사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 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독일에 朝鮮을 심은 작가 李彌勒

 

지구 반대 편 저 멀리에 있는 독일에 한국이 언제부터 알려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1669년 발간된 그림멜스마우젠의 《모험적인 짐플리시므스》가 처음인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 후 함부르크에서 발간된 주간지 《유럽 수요 신문》은 1674년 1월 7일자 기사에 "코레아에서 쫓겨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부들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는 내용을 실었다. 이 때부터 여행기와 설화집 등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몇 권의 책자들이 출간되었고, 그 후 19세기 후반부터 <한국 동화의 전설> (1893),  <춘향전> (1894),  <조선 여행기> (1915) 등이 발간되었으며 1923년에는 안드레 에카르트의 <한국어 문법>, <한국 예술사> (1927) 등으로 한국소개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각도로 한국을 소개한 사람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자전 소설을 독일어로 발표하여 그 해의 '독일 최우수 소설'을 거머쥔 사람, 바로 이미륵이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 문단에 돋보이게 소개한 최초이며 유일한 인물이다.

 

 1.이미륵의 일생

  이미륵은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시 남영정 205번지에서 당시 천석꾼이었던 이동빈(전주 이씨)과 이성녀(청주 이씨)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륵은 아명이고 본명은 의경이며 어릴 적 그의 별명은 정쇠였다고 한다. 미륵이라는 아명은 그의 모친이 38세때 아들을 낳기 위해 미륵 보살을 찾아 백일 기도를 드린 끝에 얻었다고 하여 얻게 되었다. 어린 시절 통감, 사략, 맹자, 중용 등 한학을 공부하고, 신식학교를 다닌 이미륵은 1910년 11세의 나이로 17세인 최문호와 혼인하였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1917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전신인 경성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경성의전 3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추적에 못 이겨 끝내는 밀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도망쳤다. 그후 약 6개월간 여권을 얻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임시 정부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으며 중국 여권을 얻은 후 독일로 망명을 갔다. 마르세이유에서 우연히 한국을 잘 아는 빌헬름(분도회 전도사)을 만나 그와 함께 독일의 뮌스터 슈바르차하라는 수도원에 도착(1920년 5월 26일), 8개월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독일어 공부에 열중했다. 다음 해 1월부터는 뷔르츠브르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1923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으로 휴학하고 1925년부터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26년에는 외국인 학생회장도 지내고, 1927년에는 늑막염으로 스위스의 루가노 요양소에 3개월간 입원했으며 1938년 7월 28일에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렸을 때도 예민하여 그리 건강치 못했던 미륵은 이국 만리에서 고생하면서 공부하다보니 병에서 별로 해방되는 날이 없었다. 그는 공부가 끝나고도 전공분야에 종사하지 않고 창작에 몰두하여 한국을 배경으로 글을 썼다. 전 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와 만나 향수를 달래면서, 학술논문 번역, 신문·잡지에 발표하는 원고료 및 서도 지도 등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1931년부터 그는 자일러 미술교수 집에 기거하면서 자신의 작가적 소질을 더욱 길렀다. 그 후 <한국의 어느 골목의 밤>, <열녀문>, <한국과 한국인>, <수암과 미륵>, <주인과 하인>을 발표했다. 1946년에는 그가 그 동안 써온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으며, 그가 거주하던 뮌헨 교외의 그래펠핑지역에 '월요문인회'라는 문인단체를 조직했다. 정기적으로 분할토론회와 시사토론회를 가짐으로써 많은 지식인들, 특히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활동 범위는 점차로 확대되었고, 그의 학문적인 지식이나 문학적인 소질 역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후에 뮌헨의 파란만장한 문화생활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창작과 함께 뮌헨 대학에서 한학과 한국 문학을 강의하던 이미륵은 위암으로 1950년 3월 20일 51세의 나이에 그리워하던 조국 땅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고 말았다.

 

 2.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압록강은 흐른다> 에는 그의 어린 시절 사촌형 수암과의 얘기부터 독일로 망명오기까지의 과정이 쓰여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환경 그리고 일본의 우리 나라 침략과 만행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가 모르는 달콤한 이야기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아름다운 조선의 한 폭의 풍경을 그는 숨막힐 듯 조용한 문체로 이끌어 나간다.

  이런 문체 때문에 그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어로 쓰여진 글 중 가장 빼어난 미문이라는 평을 들으며 오랫동안 괴테와 함께 독일 중·고교 교과서에 4종이나 실려왔다. 이 소설의 서평만도 독일의 저명 신문에 1백회 이상 발표되었으며 영 - 불 - 독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한국을 새롭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 작품이 1950년에 재판되었을 때에도 서평에 인색한 독일의 평론가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 여러 신문과 잡지에 좋은 서평을 실었다. '바이어리쉐 슐레(Die Bayerische Schule)'는 다음과 같은 서평을 실었다. "그의 언어는 아주 소박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하우젠슈타인은 "<압록강은 흐른다> 에 나타난 동서양의 대면은 개인적인 것을 초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본질적이고도 내면적인 구체성은 확고한 동양사상에 입각한 작가 자신의 조용한 성품에서 드러난다. 즉, 은연중에 겸손하게, 그러면서도 심오한 자세로 동서양의 대면을 자기 자신 속에서 완성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라고 평했다. 또한 어느 저명한 독일의 잡지사에 의하면 "금년도에 독일어로 발간된 서적 중 가장 훌륭한 독일어로 된 책은 우연히도 어느 외국인에 의하여 쓰여졌다. 그분이 바로 이미륵 씨이다."라고 그의 작가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작품을 발간해 준 피퍼 출판사 사장도 그의 자서전 《출판인으로서의 내 인생 Mein Leben als Verleger》에서 "이미륵이 쓴 어린 시절의 이야기 <압록강은 흐른다> 는 내가 발간한 책들 중 가장 훌륭한 책들 중의 하나였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이미륵의 계속되는 압록강 건너기

  독일인의 가슴에 이미륵이 그토록 오래 심어져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작품 못지 않은 그의 따뜻한 성품이었다. 고요한 신비를 지닌, 감화력이 강한 인격자로서 알려진 그의 주변에는 재미나는 이야기도 많다. 그는 고요한 한국적 시상을 찾기 위해 고향산천과 유사한 곳에 오두막을 짓고 집필했다고 한다. 또한 반 나치스 활동의 학생을 지도한 죄로 사형을 당한 후버 교수의 미망인에 대해 가장 친한 친구도 피해 가는 때에 그가 양팔을 펴서 부인을 껴안고 위로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격을 말하는 미담으로 널리 전해오고 있다. 심지어 그가 자주 들렀던 대학 뒷골목에 있는 고서점 여주인 힐게 볼모르트는 그녀가 죽을 때 이미륵의 묘소뒤에 묻게 해달라고 유언했고, 그녀는 유언대로 그의 묘소 바로 뒤에 묻혔다.

  그는 망명자 신분으로 살면서도 벨기에 피압박 민족대회에 까지 참석하여 직접 태극기를 그리고 일본의 죄악상을 알리기도 했다. 또한 이미륵은 한시와 서예에서도 일가견를 이루었는데 그에게는 많은 문하생들이 이었다. 그 유럽 문하생들은 한자를 뼈다귀 글자라 부르며 배웠다고 한다.

  이렇듯 독일에 '미륵리 게젤샤프트(독일인들의 이미륵 추모회)'까지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륵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이런 우리의 무관심으로 이미륵의 묘소는 관리비를 내지 않아 페묘될 위기에 놓였었다고 한다. 뒤늦게야 우리 나라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서 이미륵 기념 사업회도 열고 그의 유고와 사진, 편지 등 300여 점의 자료도 94년 이후 서초동 국립 중앙 도서관 7층에 소장된 실정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미륵의 삶은 그렇게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왜 그토록 어렵게 중국 여권을 얻어가며 독일로 가야 했는지, 장래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접고 문학가가 되었는지, 왜 죽음 직전 <압록강은 흐른다> 의 속편 원고와 또 다른 원고는 스스로 불태워 버렸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이 모두 고향에 대한 향수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끝까지 그의 병상을 지키며 독신으로 산 닥터 에파나 '동양의 천재'에 매혹되어 평생 그를 사모한 엘리제 지그문트와의 관계 역시 알려진 바가 없다. 비록 그의 삶을 자세히 그려볼 순 없지만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그의 슬픈 압록강 건너기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당신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나의 소설은 나의 소년시절에 체험한 일들을 소박하게 그려 보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체험들을 서술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기술적이고 설명조인 묘사는 피했습니다. 동시에 동양인의 내면세계에 적합하지 아니한 세계적인 사건들은 비교적 조심성 있게 다루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그려냄으로써 한 동양인의 정신세계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친근한 것으로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이미륵이 피퍼 사장에게 보내는 글 중의 일부―

                  ■이미륵(李彌勒:1899∼1950)

본명 이의경(李儀景). 미륵은 아명(兒名)이자 필명. 황해도 해주 출생. 1920년 독일로 가서 뷔르츠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이학(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년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 독일 최우수 소설로 선정되며 평단과 대중의 인기를 독점했다. 여러 편의 소설과 시를 발표하고 뮌헨 대학에서 동양 철학과 한학, 한국학 등을 강의하다 뮌헨 근교 그래펠핑에서 타계했다.

 

***

"어머니, 제가 왔어요."이렇게 말하고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한참이나 이렇게 앉아 있다가 수심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자기를 껴안았다는 사실만이 소중했다. 그 일은 너무나 값지고 성스럽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껴안아 준 것만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그림 와이, 글 이미륵(1899~1950,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 소설 '어머니'(계수나무 刊)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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