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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의 묘소를 다녀와서

이유랑 2003.06.24 11:25 조회 수 : 7134

그래펠핑 언덕의 바람
이유랑
게르만 땅에서 보낸 세월이 적지 않지만 뮌헨 땅을 밟아 볼 기회가 없어 늘 아쉬웠다. 전공간판을 여전히 문학으로 내걸고 있었기에 뮌헨은 일부로라도 한 번 찾아보아야 할 문화의 고장이었다. 지난 2월 (2002), 마침내 뮌헨 땅을 밝게 된 것은 그러나 문화적 관심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건수가 생겨 빵을 벌러 간 것이다. 그럼에도 뮌헨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내 의식의 창에 떠오른 것은 풍족한 빵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얼굴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 사람의 얼굴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 바로 이 미륵과 브레히트의 얼굴이었다. 물론 난 이 둘을 직접본 적은 없다. 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고인이 된 두 사람이 뮌헨 행 기차 안에 앉은 내 의식의 영상에 얼른거렸을까? 아니, 이 두 사람이 뮌헨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미륵과 브레히트는 한 살 차이로 살아 있다면 브레히트가 형뻘이 된다. 이 미륵은 103살이 되고 브레히트는 104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미륵은 51 세에, 브레히트는 58 세에 세상을 떠났다. 저 지난한 1950년대의 일이다. 이들의 이른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 미륵은 『압록강에서 이자르강까지』라는 책제목이 암시하듯이 일제시대 때,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을 피해 만주로 프랑스로 독일로 긴 망명의 길을 걸은 비운의 작가였다. 유사하게도, 브레히트는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긴 망명의 길에 오른 후 15년 동안 '나라 바꾸기를 신발 갈아치우듯이' 한 실향의 작가였다.

두 사람의 생에서 뮌헨은 각별한 의미를 띈다. 젊은 날 브레히트는 뮌헨에서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 미륵은 뷔르츠부르크에서 의학을 시작했지만 역시 뮌헨으로 와 동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둘 다 그런 전공과는 무관한 문학의 길을 갔고 작가로서 인생을 마감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작가로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둘 다 타국에서 조국을 더 많이 생각한 이방 속의 애국자였다. 물론 두 사람의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끄럽게도 난 브레히트의 책은 좀 읽었지만 여태껏 이 미륵의 책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런 인상주의적 유사성보다는 내용적 차이가 더 클 것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한 브레히트가 이 미륵을 언급한 적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가는 뮌헨을 그리며 이 두 사람을 떠올린 것은 두 작가에게 차지하는 뮌헨의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욱스부르크 태생인 브레히트가 작가로서 발판을 굳힌 곳이 바로 뮌헨이었듯이 이 미륵의 문학적 산실도 뮌헨이었다. 잘 알 듯이 이 미륵의 작품은 거의 뮌헨에서 집필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도 뮌헨 땅이었다. 그가 누워있는 묘지도 뮌헨 근교의 그레펠핑에 있다. Graefelfing, 실은 이 글을 쓰게 된 실제적인 동기는 그래펠핑 공동묘지를 방문한 사건에 있다.

내가 뮌헨에 도착한 후 그래펠핑 묘원 (독일 공동묘지는 잘 가꾸어진 공원과 다를 바 없다)을 찾을 여유가 생긴 것은 아르바이트로 정신없이 몇 주를 보낸 어느 일요일이었다.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래펠핑은 뮌헨 시내에서 전철로 20분 정도 걸리는 외곽에 있었다.

게르만의 겨울 전반이 그렇지만 2월 초순의 뮌헨 하늘은 몹시도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비바람마저 몰아치는 도시의 거리엔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집도 있고 차도 있었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묘지에 이르기도 전에 거의 묘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일찍이 전 혜린이 그려 놓은,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동경마저 불러일으켰던 저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 보다 더 무거운 풍경이었다. 물론 그런 분위기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햇살보다는 차가운 겨울 바람을 좋아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한산한 전차 안에서 바라본 뮌헨의 외곽은 숲의 나라답게 집보다 나무가 더 많았다. 그렇게 뮌헨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2-30분을 가니 과연 아담하고 한적한 그래펠핑 역이 나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조그만 도시의 이름은 8세기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이 미륵이 그래펠핑 묘지에 누워있다는 정보는 들고 왔지만 거기에 묘지의 주소가 나와 있지 않았다. 만 삼천 명이 사는 그래펠핑이 모두 공동묘지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가로 늦게 깨달았다. 결국 전철역에서부터 묻고 물어 접근해 갈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 물을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단 방향을 잡고 한참을 찾아가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만 개울이 하나 나왔다. 겨울이라 그런지 수심은 시리도록 깊었다. 좁다란 다리를 건너 마침내 이름도 그럴듯한 Grosshaderner Strasse (街)에 도달했다. 거리 이름이 그럴듯하다 함은, Gro hadern은 어의가 '크게 씨름하다'는 뜻이 되는데 공동 묘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운명과 '크게 씨름한'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크게 씨름해야 하는' 삶의 경계를 넘으니
'평화의 전원' (Friedhof), 즉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숙연한 마음으로 들어선 묘원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어딘가 묘지나 비석의 배열을 설명해 놓은 안내문이 있겠지만 우연에 맡기고 무작정 비석 사이를 걸었다. 알파벳 속에 李儀景 (이의경)이란 석자를 발견하는 것은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자들의 동산'을 걷는 것이 왠지 싫지 않았다. 당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나는 삶에 몹시도 지쳐 있어 아예 삶을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군가 말했듯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이미 절반은 죽은 것이라는 논리를 따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빗방울 섞인 바람을 헤치고 끝없이 이어진 비석 사이를 마음의 불평 없이 유랑했다. 그러나 반시간을 넘게 그렇게 헤매어도 이 미륵이란 이름 석자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고 빗방울도 잦아졌다.

그때, 저만큼 앞쪽에 한 쌍의 노부부가 눈에 띄었다. 비석을 찾는 무슨 시스템이 있나 싶어 물어 보려고 다가갔다. '그뤼스 곳', 인사를 하고 막 질문을 하려는데 그 보다 한 순간 더 빨리 할아버지의 한 마디가 날아들었다. "아, 리 교수를 찾아 왔구만요." 나를 바라보는 노안에 반가움이 환히 피어났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 말고 딴 사람이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변은커녕 황량한 묘원 어디에도 살아 있는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해도 비바람 부는 늦겨울에 묘원을 찾을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미록 리의 묘를 찾는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꾸를 했다. 그의 말은 분명 이 미륵을 두고 한 것 같았지만 그때까지 이 미륵을 박사로 칭하는 것은 들었지만 교수로 칭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같이 반색하기에는 조심스러웠다. 리 씨 성을 가진 이름난 동양 학자가 거기에 묻혀 있지 마라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할아버지가 말하는 리 교수가 바로 이 미륵임이 드러났다. 이 미륵이 뮌헨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Karlheinz Gottschall (실명을 써도 되는지 모르지만)이라 이름하는 이 할아버지는 이 미륵의 비석을 찾는데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며 앞장섰다. 그의 부인도 육중한 몸으로 덩달아 분주히 움직였다. 그 와중에 우리는 오랜 지기가 된 듯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놀랍게도 이 할아버지는 전후에 그래펠핑에서 한동안 이 미륵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 미륵의 인격과 지성을 칭찬하면서 특히 이 미륵의 유머 감각을 강조했다. 하나의 실 예로 이 미륵이 초콜릿 먹기 놀이 (Schokoladenspiel)에서 보여준 기지와 재치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 미륵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던 나는 주제의 범위를 확대하여 이 미륵의 한국과 동양에 대해 지껄이고 있었다. 구체적인 데 자신이 없을 때 일반론으로 돌아가는 것은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의 본능이다.

드디어 우리 셋은 이 미륵의 묘소에 이르렀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그의 묘는 1996년 이 미륵 기념 사업회가 이장을 해서 보기 좋게 꾸며 놓았다. 그 품격이 주변의 어느 묘지에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전통적인 한국식 묘지 조성은 독일인들에게 색다르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지붕이 있는 묘비 (갓비석)와 그 앞의 상석 그리고 상석 옆의 석등, 이런 것들의 기능과 의미가 외국인들에게 궁금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나는 아는 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Gotschall 부부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묘비 뒷면에 한글로 쓰여 있는 비문의 내용이었다. 앞면엔 독일어로 쓰여 있어 문제가 없었다. 그것은 '이 미륵의 뛰어난 인격과 문학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 정신적 다리를 놓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는 의미의 말이었다. 비석 뒷면에 한글로 빼곡이 쓰여 있는 비문은 이 미륵의 전기를 간단히 적어 놓은 것인데 자세히 번역을 해 주었다. 여기서 그래도 명색이 문학공부를 했다는 내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즉, 이 미륵의 많은 텍스트 중에서 그럴듯한 문장 하나쯤 인용해 놓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이 그의 책 한 권 제대로 읽어 본 것이 없는데 누구에게 그런 아쉬움을 표하랴. 불운했던 조국의 한 문인을 그토록 소중하게 기억하고 존중하는 외국 사람 앞에서는 더욱 그럴 수 없었다.

속살까지 헤치고 들어오는 겨울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이 미륵의 묘소 주위를 서성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에게 그리움으로 남는 다는 것, 그것은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Gottschall 씨에게 이 미륵은 실로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할아버지는 '강의에 대한 대가'(강의라니?) 라며 조심스럽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예상치 못한 일인데다 비에 젖은 내 몸 꼴이 어디에 들어가 앉기가 무안스러워 망설이고 있는데, 그러면 밥이라도 한끼 사 먹으라고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50 Euro짜리였다. 독일에서 50 Euro (100마르크가 넘는)면 어떤 화려한 저녁도 한 끼 먹을 수 있는 거금이다. 마음은 굴뚝이나 다시 망설여졌다. 순간 어디선가 읽은 이 미륵에 대한 일화 하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전후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이 미륵은 돈이 바뀌기 직전에 어떤 목수에게 상자를 하나 주문하여 샀다. 하루 뒤에 이 미륵이 지불한 돈은 휴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미륵은 곧 목수를 찾아가 국가로부터 지급 받은 새 화폐로 상자 값을 다시 지불했다. 화폐를 개혁해야 하는 사회의 인심이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흉흉했을 것이다. 하여 상자 사건 이후 그 일대에는 '한국인=정직'이라는 공식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 이 미륵의 인격이 나의 거지 근성으로 손상을 입을까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고마움은 오히려 한국인인 내 쪽에서 표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옆에 있던 할머니도 뭐라고 거들고 해서 난 그 50 Euro를 못이기는 척 넙죽 받아 넣었다. 그와 함께 할아버지는 자신의 명함과 이 미륵을 잘 알고 있다는 또 한 사람 (Arnds v. Berlepsch, 그러나 뮌헨을 떠나오기까지 이 사람을 한번 찾아 볼 여유가 없었다)의 주소를 건네주었다.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하니 할아버지는, "하늘에 있는 리 교수에게 고마워하라"는 말을 남기고 아쉬운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Gottschall 부부가 떠난 이 미륵의 묘지 앞에 나는 홀로 한 참을 더 서 있었다. 뮌헨에 아르바이트하러 가던 당시 나는 문학이란 것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다. 아니, 버거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인문학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시대 상황도 상황이지만 개인적 능력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펠핑에서 이 미륵을 만난 후 난 최소한 문학이나 문학의 의미를 농담으로라도 부정하지는 않아야 되겠다 생각했다. 그건 이국 땅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은 '빵 되는' 전공 대신에 조국을 알리는 인문학에 나머지 인생을 바치며 가난하게 산 이 미륵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런 이 미륵을 물심양면으로 밀어 준 자일러 교수나 저 Gottschall 부부의 소중한 기억을 평가 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 미륵은 누구인가? 난 그럼에도 이 미륵에 대한 윤각 선명한 이미지 하나를 떠올릴 수 없었다 (문학한 사람의 논리로 볼 때, 그건 아마 그의 책 몇 권은 읽어봐야 가능할 것 같다). 이 미륵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조용하나 쾌활하고 유머스런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몇 장 봤지만 이국 생활의 고독과 우수는 크게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타고난 낙천가였던가? 어쨌든 그는 병마에 시달리다 51살에 끝내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지 않았는가.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묻혀 이미륵의 묘지를 뒤로하고 묘원을 빠져 나오는데 차가운 겨울비가 바람마저 무겁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뜻 묘원 입구에 이상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그것은 배 모양으로 된 공동묘지 부속 교회로 실제로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었다. 공동묘지 안의 강과 배, 내게 이 세 단어는 곧바로 저 고대 그리스인들의 죽음에 대한 표상 (Vorstellung)을 일깨웠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명부로 가고, 그 도정에 레테라는 강을 건너도록 되어 있고, 배로 그 강을 건너며 물을 떠 마시면 이승의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것. 이승의 모든 걸 잊어야만 명부에 잘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문득 죽음이란 화두와 함께 『압록강은 흐른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 눈이 내렸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성벽 위로 하얀 눈송이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정다운 순백의 빛깔을 보자 행복해졌다. 그것은 고향 마을에 자주도 내리던 그 눈이었고 송림만에 내리던 바로 그 눈이었다. 이날 아침 먼 고향에서 처음으로 소식이 왔다. 이번 가을에 어머니가 며칠간의 고통 끝에 세상을 떠났다, 고 큰누나가 써 보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는 문체가 언뜻 까뮈의 저 『이방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미륵의 정제된 감성을 삶의 부조리를 앓고 있는 뫼르소의 것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자 (단편적으로 읽은 이 미륵의 작품은 거의 자연에 대한 서정적 감성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삶을 비극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어도 대책 없는 부조리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 미륵의 저 방념한 (gelassen) 서술은 어쩌면 어머니의 바램에 상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미륵의 어머니는 일경의 추적을 받고 있는 아들에게 망명을 재촉하면서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너를 크게 신뢰하고 있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게 국경을 넘어 마침내 유럽에 도착할 것이다. 이 어미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라. 조용히 기다리마. 세월은 너무도 빨리 흘러가지 않니. 우리가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내 생애에 넌 너무도 많은 기쁨을 주었다. 그러니 아들아, 이제 홀로 떠나거라! >

스무 살을 갓 넘긴 외동아들을 그림에도 한 번 보지 못한 먼 유럽으로 떠나 보내면서 하는 어머니의 말치고는 역시 너무나 담담하게 들린다. 그러나 표현이 담담한 거지 마음이 담담했을까. 아니, 이 짤막한 몇 마디엔 수백 마디로도 풀어 쓸 수 없는 격정이 압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체 이 미륵이 어떤 아들인가. 그의 어머니가 애끓는 불공을 들여 나이 서른 여덟에 낳은 아들이다. 미륵이란 아명은 바로 거기서 유래한다. 나중에 아들은 그것을 필명으로 사용하므로 어머니를 영원히 기리게 되지만 끝내 다시 보지는 못했다.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 미륵의 어머니는 그 때 이미 자신의 미래를 예견했는지 아들과 작별을 고해 둔 셈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 미륵의 저 담담한 회상은 바로 어머니 자신의 초월적 감성과 닮아있다. 그것은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면 어머니가 경도했던 불교적 세계관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과 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방념의 태도는 불교계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회색 도포를 즐겨 입었던 이 미륵에게서 독일 사람들은 조용한 동양의 신비와 초연함을 느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그런 모습에서 보지도 못한 Yalu의 속 깊은 물결을 느꼈을 것이다. 압록강, 레테도 아닌 압록강을 이 미륵은 한번 건넌 이후 다시는 건너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늘 압록강이 흐르고 있었다. 나중에 『여전히 압록강은 흐른다』고 다시 한번 압록강을 책제목으로 잡은 것은 제목의 빈곤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무 살에 독일에 와 오십 한 살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한국보다 독일에 산 것이 10년은 더 많았다. 따라서 소위 제대로 된 공부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한국에 대한 것만 썼다. 그럼에도 그는 처자식이 있는 한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왜?...

그렇게 공동묘지가 있는 언덕을 내려오니 올 때 건넜던 개울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분명 동일한 개울이지만 동일한 물은 아닐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아무도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그 개울을 건너면서 난 이 미륵에 대한 형상 만들기를 포기했다. 물은 형상이 없다. 내 언제 그래펠핑 묘원으로 가는 그 개울을 다시 한 번 건너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건 분명 압록강을 한 번 건너는 것보다는 쉬운 일임에 틀림없다.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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