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일러 교수댁 (2)

  1944년이면 이미륵이 독일 땅에 도착한지 어느덧 24년, 자일러댁에 온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 연합군의 폭격이 잔혹했던 공포 속에서 이미륵은 자신이 자일러댁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현실인가를 레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백하고있다.

   “친애하는 레네, (……) 공습은 새벽같이 시작되어 생활필수품들을 지하실로 들고 갔다가 다시 들고 올라왔어. 오늘은 세 번인가 네 번 경보가 울렸어. (……) 또 기차가 공격을 받아 정차하고 있으면 갑자기 다시 걸어 온 때도 있었어. 내가 이 시기에 시내의 어떤 낯선 사람의 집에 살아야 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 나는 행복한 거야. (……) 너의 미륵.”(1944년 1월 9일, 이미륵이 헬레네 군데르트에게 보낸 편지)

  이 때가 바로 이미륵이 천신만고 끝에 탈고한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sst》를 간행하기 위해 출판사들을 물색하고 다닐 때였다. 마침내 확정된 곳이 뮌헨의 피퍼(Piper) 출판사였으며, 출판계약 일자는 1944년 7월 24일이였으나. 책이 발간된 것은 계약일로부터 일년 반이나 지난 1946년도이며, 책이 출판되자 서평에 인색한 독일 신문들이 앞 다투어 찬사를 싣기 시작했다. 필자가 출판사와 신문사 혹은 도서관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찾아 낸 독문서평만 55편이 된다.(자료지에 수록된 ‘서평’-부록 참조!) 출판계약서에 의하면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책이 발간되면서 인세의 선불로 1,000마르크(RM: Reichsmark)를 받게 되어 있으며, 발간 이후의 인세는 판매가의 15퍼센트가 작가에게 돌아가기로 되어 있다. 리나 자이처의 전언에 의하면 이미륵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인세 일부를 자일러 여사에게 현금으로 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묘하게 다른 방법으로 드리는 분이었다고 한다.
  1946년이면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어 독자들의 호응과 찬사를 받기 시작한 해이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에 접어들면서 동료들과의 모임은 물론 집안에서도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스웨덴에 사는 친구 베너의 부인 마야(Maja)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자일러댁에서 훈훈하게 지내는 분위기가 엿보인다. 

  “여인네들은 놀랄만한 사람들입니다. (……) 부엌 가까이만 가도 벌써 성탄절 냄새가 나고 있어요.”(마야에게 보낸 편지, 날짜미상). 

  1947년 성탄절쯤으로 추정되는 다음 편지에는 자상한 자일러 여사의 어머니상이 선하게 나타난다. 

  “우리 집 선량한 어머니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이런 준비를 할 수 있었을까? 실로 수수께끼처럼 보여. 누구에게 뭐가 빠졌고, 누가 어떤 소원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알아내는 시간이 어떻게 있었을까.”(1947년 성탄절 쯤 헬레네 군데르트에게 보낸 편지, 일자미상).

  1957년도에 독일 펜클럽협회 부회장이었던 리하르트 프리덴탈 박사(Dr. Richard Friedenthal)가 한국을 다녀갔다.《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한 피퍼출판사의 부탁으로 프리덴탈은 한국에 와서 서울에 사는 이미륵의 누님을 찾아 반도호텔에서 상봉했던 얘기가 독일 언론에까지 실렸다. 이 소식에 접한 자일러 여사가 프리덴탈의 비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우리 집에 오랜 세월동안 같이 살았기 때문에 이미륵의 유년시절과 관계되는것은 어느것이나 다 저에게 친밀감을 줍니다. (……) 그분들이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것을 묘사한 장면이 저를 얼마나 감동시켰는지 모릅니다.”(1957년 10월 13일 알리체 자일러 여사가 프리덴탈의 비서인 텐너(Tenner) 양에게 보낸 편지).

  이미륵이 독일에 도착한 이후에 생활하던 시기는 세계정세가 극도로 어지럽고, 또한 전쟁의 무서운 포화 속에서 그리고 히틀러의 독재가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던 때였다. 게다가 종전된 직후엔 독일 경제도 극도로 나빠지고 인플레이션 때문에 온 국민이 고통을 받던 때였다. 그래도 자일러댁에서 집필 작업에 전념하던 이미륵은 1948년 어느 날 카드를 정리하여 보관하는 나무상자가 필요하여 어느 소박한 목수를 찾아가 자신에게 필요한 상자의 모양과 크기 등을 그려 주문하고 일주일 후 그는 돈 뭉치를 들고 가서 주문한 것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이미륵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간신문을 펴보니 급작스럽게 “화폐개혁” (1948년도)이 되어있었다.
  실로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온 국민이 무겁게 들고 다니면서 사용하던 돈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고, 국가에서 독일 전 국민에게 각기 40마르크 씩 나누어 준다는 발표가 나왔다. 나무 상자를 어제 찾아온 이미륵으로서는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목수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도 큰 손해였다.
  여기서 이미륵은 갈등이 생겨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의 양심상 이런 식으로 이 나무상자를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새 돈이 발행되어 40마르크를 손에 쥔 그는 어느 다른 목수를 찾아가 제작비를 알고 자기에게 나무상자를 만들어 준 목수에게 그 돈을 전해주었다는 미담이 그래펠핑에 돌았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륵이라는 한 인간의 훌륭한 인간성뿐만 아니라 그가 바로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독일에서 공부하거나 생활하는 교포들에게 자랑거리요, 명예로운 인물로 남게 되었다.
 
1928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어렵게 살며 고생하다가 1932년 자일러댁의 은덕으로 편안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었던 이미륵은 이 집에서 근 20년 동안 한 집 식구처럼 걱정없이 살아왔다. 만약 이미륵에게 자일러 교수 내외라는 독지가이자 보호인이 없었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9년 2월 26일 아킬린다슈트라쎄 46번지에서 파슁이라는 즐거운 축제가 거행될 예정이었다. 이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춤추며 밤늦게까지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맥주, 꼬냑, 소시지 등 온갖 간식 등도 준비한다. 이 파슁에 초대하는 초청장도 1949년 2월 7일 이미륵이 써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낸다. 
 
여름이 지나고 10월 중순 이후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던 모양이다. 주치의의 진료를 받으면서도 통증이 있었을 때 헬레네 군데르트의 남자친구가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는 편지를 받고 1949년 10월 25일 위로하는 글을 쓰는 가운데 자신의 건강에 대한 얘기도 언급한다.

  “나도 협심증 때문에 아파 누워서 살아보려고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어. (……) 한번 우리 집에 올 수 없을까? (……) ―너의 미륵”

  이렇게 이미륵의 건강상태가 나빠지고 중환이 계속되어 자리에 누워 있게 된 곳도 바로 자일러댁이었다. 어머니같은 자일러 여사와 리나의 변함없는 보살핌을 받았던 곳도 자일러댁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우환이 겹치게 되었다.
  스웨덴에 사는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가 10월 초에 보낸 편지를 받고 1개월이나 거의 지난 1949년 10월 31일자로 이미륵이 보낸 회신 내용에 자일러 여사의 병환에 관한 얘기가 실려 있다.

“친애하는 베른하르트에게, (……) 자일러 여사가 위험한 뇌염 때문에 병석에 누워 계셨어. 우리 모두는 그녀가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어. 의사 선생의 권유로 모든 친척들에게 전화로 빨리 오라는 전달도 했었어. (……) ―자네의 미륵”

건강을 다시 회복한 자일러 여사는 병석에 누워있는 이미륵을 극진히 간호해 주었다.

“식구들은 모두 걱정을 하면서 나를 간호해 주었고, 이번에는 어머니가 내 옆에서 지켜주셨어. 협심증 증세가 일주일이나 지속되었고, 재발을 막기 위해 7주일 간이나 조용히 누워 있어야 했어.” (위 편지내용과 같은 일자).

  그로부터 약 2개월이 조금 지나자 이미륵의 건강상태는 심각하게 나빠지기 시작하여 벡크만 박사의 적극적인 치료를 받았으며, 결국은 1950년 1월 25일까지 5일간 에벤하우젠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다가 뮌헨 교외에 있는 볼프라츠하우젠 지역병원 (Kreiskrankenhaus Wolfratshausen)에 입원하였다.

  자료를 추적하는 도중 1973년 2월 13일자로 볼프라츠하우젠 병원에서 게오르크 퀴트겐스 박사(Dr. Georg Kuetgens)가 필자에게 보내준 공문에 의하면

“이미륵은 에벤하우젠 요양소에 5일간 있다가 1950년 1월 30일 우리 병원으로 왔습니다. (……) 이박사는 주임의사인 페라리 박사(Dr. Ferrari)의 집도로 수술을 받았고, 페라리 박사는 이미 별세했습니다. 보조의사였던 도블러 박사(Dr. Dobler)는 지금 다른 병원에 전근 갔기에 전화로 문의했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박사가 수술 받은 날짜는 정확히 1950년 1월 31일입니다. 이박사는 당시 그래펠핑 아킬린다슈트라쎄 46번지에 거주하던 자일러 교수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 서명” 
 

  병원에서 수술이 끝나고 치료를 받다가 이박사는 2월 8일에 다시 에벤하우젠 요양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요양소에 약 1개월 동안 체류하며 회복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때였다. 마침 같은 요양소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Gerhart Hauptmann)의 부인 마르가레테 (Margarete) 여사가 노환으로 입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요양원에서 읽고 찬사를 담은 카드를 보냈다. 

  “작가 이미륵씨에게, (……) 《압록강은 흐른다》는 시적인 미美로 가득 찬 책으로서 독자를 황홀하게 하는 낯선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고향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동시에 그 고향의 좋은 면과 어두운 면에 대해 흡사 향수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 감사의 뜻을 전하며 쾌유를 빕니다. (마르가레테 하우프트만)” (1950년 3월 1일, 마르가레테 여사가 이미륵에게 보낸 편지). 

  유명인사 부인이 작품을 호평하며, 쾌유까지 비는 이 편지를 받은 이미륵은 잠시나마 위로가 되고 기뻐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집안에 우환이 겹치자 자일러 교수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며칠간 신경을 많이 쓰던 때였다. 연말도 어수선하게 보내고 초봄에 접어들던 1950년 3월 3일 자일러 교수는 무슨 일로 뮌헨에 나갔다가 큰 변을 당하게 된다. 가정부였던 리나 자이처의 전언에 의하면 이렇다
 
  “아침 8시 경에 뮌헨으로 나가셨는데 테아티너슈트라쎄에서 쓰러져 사망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1972년 9월 14일 리나가 필자에게 전한 말).

  그 당시 자일러 여사는 에벤하우젠 요양소에 입원해 있는 이미륵을 간호하고 있던 중 급히 비보를 받고 그래펠핑으로 달려 왔다고 한다. 식구들이 모두 놀라 황당했지만 비통한 마음을 차분히 달래고 며칠 후 장례를 치루었다.
  그후 자일러 여사와 에파는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이미륵의 옆을 교대로 지켜야만 했다. 3월 13일이 되자 환자는 병세의 심각성을 알았던지 그래펠핑 집으로 가겠다고 하여 퇴원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 식구들은 물론 주치의도 방법이 없어 다시 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한다.
  3월 20일 저녁 임종이 다가오자 이미륵은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통제를 맞고 나서 <애국가> 중에서 '우리나라 만세!'를 낮은 소리로 불러 지켜보고 있던 방문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리고 리나에게 찬물을 한 그릇 가져다 달라고 해서 얼른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그 물을 자신의 얼굴에 부으면서 “아, 시원해”하고는 아무 말 없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미륵은 향년 51세로 파란만장했던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