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인 藜堂隨筆集 (여당수필집)의 일부분입니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셨던 여당 김재원박사님께서 저술한 책입니다.

교우관계
「자일러」부인
결국 이미륵씨의 가장 큰 친구는 「자일러」부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의지할 곳 없는 한국의 불우한 청년을 몹시도 존경하여 자기집에 데려다 두고 죽을 때까지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부인은 대단히 재주가 있는 분으로 특히 문학적인 소질이 많았고 아마도 『압록강은 흐른다』도 부인의 손을 거쳤을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영어 불어 이태리말에 능통하고 특히 영어와 이태리어에는 거의 그 나라사람과 같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옷토」라는 기계과 출신의 공학사가 있었고 딸에 「에리자베스」라는 체육선생을 하는 분이 있었다. 모두 인격이 높은 분으로 「자일러」댁에 자주간 나는 항상 그 교양에서 오는 분위기에 감탄하고 돌아왔다. 이미륵씨는 원래 폐가 좋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세상을 떠날 때의 병은 협십증 이라는 병에 다른 병이 합친 것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망의 직접 원인은 암이었다는 말도 들었으며 어느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미륵씨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자일러」부인은 남편「자일러」박사가 동시에 급서하한 후임을 알게 된 모양이다.
「자일러」박사는 물론 나도 몇 차례나 만난 분으로 그야말로 전형적인 온후한 신사였었고 한편 적극성이 부족한 분인 듯한 인상이었다. 「자일러」부인은 작년에 「수트드가르트」(Stuttgart)시에서 별세하였다. 부인은 말년에는 한국사람을 만나면 이미륵씨의 생각이 나서 한국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다고 전한다.
「리나」양
「리나」양은 본래 「자일러」가에 있던 하녀이다. 그는 이미륵씨를 숭배하다시피 사랑한 여자로 바로 그 사람이 현재 「그래펠핑」근처에 결혼하여 살고 있으며 때때로 이미륵씨 묘소의 풀을 베고 보호하는 정성이 정말 감천할 정도라고 한다. 자기의 신분과 교양정도를 알아서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다.
「E.K」(EvaKraft)
네덜란드 출신으로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이씨 말년에 아마 가장 사랑하던 애인인 것 같다. 이미륵씨 별세 후 비통한 나머지 멀리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편지를 하여 적어도 한국에라도 오고 싶다고 한 일이 있으나 외국여자를 오라고 할만한 용기가 나지 않아서 위로하여 만류한 일이 있다. K양은 그 후에 신교에서 천주교로 옮기고 최근에는 일본까지 왔다고 하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아직도 젊은 분이므로 익명으로 두기로한다. 나는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분이다.
「로사·마우러」양
위에 잠간 말한 바와 같이 1929년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그후 그 사이가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 정치적인 활동
1928년인가 27년인가 벨기에 「안트워프」시에 피압박민족대회가 있어 우리나라 사람의 대표로 파리에서는 김법린씨가 독일에서는 이미륵씨 이극로씨가 참석하여 김법린씨는 불어로 양이씨는 독일어로 연설을 하였다. 그때 소련에 망명중인 일본인 공산주의자 편산잠이 이 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우리측 대표단에서는 피압박민족회의에 일인이 참가함은 부당하다고 항의를 제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의 소식은 김법린씨는 잘 기억할 것으로 믿는다. 「뮌헨」에는 상당히 활발한 외국학생구락부(클럽)가 있어 그것은 5~6백명의 회원을 가지고 크게 주목할 정도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미륵씨는 바로 일년간 이 외국학생구락부의 회장을 지냈다. 그래서 상당히 독일사람들간에 신임을 얻고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외국으로 나온 사람인 만큼 공산주의는 싫어하고 철저한 민족주의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 때문에 공산주의 색채가 농후한 상기 피압박민족회의를 후에 대단히 재미없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뮌헨」에서 외국학생구락부회장시 그는 그의 친우 「호바아트」라는 「항가리」동료의 초대로 항가리에 여행갔던 일이 있다. 그 때 그 곳에서 「우랄·알타이」어족문화에 대하여 열변을 토한 일이 있었다.
* 그의 말년
1940년 5월 16일 베르린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직전에 이미륵씨에게서 간곡한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다. 그 후 다시 독일에 있는 여러 친구들과 서신왕래가 시작되기는 1948년 4월 내가 「록펠러」재단의 연구원으로 도미한 이후로서 그 때 미국에서 나와 수차의 서신왕래가 있었다. 그는 자기도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희망을 말하여 왔으나 나는 근 30년을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귀국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그야말로 물심양면의 준비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여 그 뜻을 전하였고 다행히 당시 내가 살던 관사가 널찍하니 귀국하면 한동안 내 집에 있으라는 말까지 하였다. 당시 그는 「뮌헨」대학에서 동양문학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고 들었고, 또 한국어도 가르쳤다고 하는데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의 후편을 썼는데, 하루아침에 무슨생각으로인지 그것을 자수로 찢어버려서 이것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을 들었다.
1949년 1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되어 「자일러」부인이 나에게 서신을 보내 이미륵씨가 병중이라는 말을 하여왔고 될 수 있으면 나의 미국친구들의 손을 거쳐서라도 어떻게 「쌀」을 보내 줄 수 없는가라는 부탁이 있었다. 이것을 실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이미륵씨의 부고를 받았다. 그 때 이것을 서울 어느 신문에 계재하였고 또 그 후 어느 신문사에서는 고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사를 쓴다고 나에게서 고인의 사진까지 수매를 가져 갔는데 그 후 6.25 동란으로 그 기사는 나지 않았고 그 귀중한 사진도 돌아오지 않고 말았다.
끝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조선일보 1959년 6월 1일)
여당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귀한 자료에 감사를 드립니다._()_ 아래 읽기 쉽게 정리하셨군요^^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