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토 자일러 (Otto Seyler) 

  얼마 동안 추적 작업을 접었다가 다시 계속하려고 할 때, 약 2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오토 자일러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뮌헨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회신이 오지 않았다. 내외가 어디로 여행을 떠난 것일까? 아니면, 혹시 이사를 간 것일까? 너무나 궁금하여 뮌헨의 ‘주민등록과’에 주소 이전 문의신청을 하고 얼마를 기다려 보았다.

  그러자 1972년 6월 19일자로 뮌헨 시청으로부터 기다리던 공문이 왔다. 오토 자일러의 주소는 뮌헨의 베얼레슈트라쎄(Wehrlestrasse) 30번지가 아니고, 올가슈트라쎄(Olgastrasse) 14번지로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현 주거지는 “포르더힌델랑, 슈반덴벡(Vorderhindelang, Schwandenweg) 15번지라고 하였다. 즉시 그리로 편지를 보냈더니 오토는 1972년 7월 2일자로 회신을 보내왔다. 내용인즉 자기네는 1970년도에 뮌헨 집을 팔고 올가슈트라쎄 14번지의 아파트를 매입하여, 그곳에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헤르만)이 살고 있으며, 자신들은 공기가 좋은 알고이(Allgäu) 지방으로 이사하였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고 얼마 후에 우리가 독일 남쪽의 보덴호(Bodensee) 근교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8월 3일 귀로에 오토 자일러가 사는 포르더힌델랑에 들렀으나 만나보지 못했다. 물론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 갔기 때문에 허탕치게 된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결국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러보았다고 간단하게 메모를 적어놓고 그 길로 뮌헨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며칠 후(8월 12일) 오토로부터 편지가 왔다. 자기네가 그때(우리가 그곳에 들렀을 때) 퓌센(Füssen)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며칠 있다가 왔는데 그 사이에 우리가 다녀갔다며 무척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언제고 뮌헨에 올라오면 그때에 꼭 만나자고 하였다.

  해가 바뀌어 1973년 4월 10일 오토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는 지금 뮌헨의 아들 집에 와 있는데 다른 약속이 없으면 오후 3시경에 우리 집에 들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상자를 하나 들고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지난번 우리가 자기 집에 다녀간 후 즉시 골방의 자료들을 챙겨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언제고 뮌헨에 오는 일이 생기면 그것을 갖고 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필자는 너무나 기쁘고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자료들인가!

  그때 오토가 들고 온 자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초고(교정본), 《박씨》라는 소설의 초고(내용 순서가 바뀌어 있었고, 또한 미완작), 이미륵이 친구들로부터 받은 편지 10통,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던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평들, 《논어, 맹자론》 원고, 사진 약 100여 매, 영문으로 된 짧은 글(미완), 《한국어문법초안》(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 등등으로 물론 잘 정돈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에겐 무척이나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 원고들은 도대체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그 동안 편지나 대담으로 못 다한 얘기를 늦게까지 나누었다. 오토는 20여 년 전의 일들이 아마도 기억에 가물가물한 모양이었다. 몸도 불편한데 그 자료뭉치를 가지고 이 먼 곳까지 차를 몰고 나를 찾아와 주었으니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1972년 9월 3일자 편지에는 이미륵의 묘소관리 문제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즉 “1975년 3월 24일까지는 이미 관리비가 지불되어 있고, 앞으로 자신이 한 번 더 낼 용의가 있으며(……), 제3연장기부터는 어느 한국인이 맡아주었으면 고맙겠다. 그 이유는 자신은 현재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어서 묘소관리에 문제가 있으며, 그리고 지금까지 애쓰던 리나 자이처(Lina Seizer) 할머니도 연로하여 언제까지 묘소관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 의문이고, 여동생(베르타)도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 살고 있으므로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또 자신은 몇 년 전부터 기억력이 쇠퇴하여 무슨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 편지 속에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에 대한 추측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그가 그 동안 발표한 글에 담은 지식보다도 인간 이미륵이 더 중요하다”고 했고, “우리 모두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을 긴장하며 기다렸건만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마도 그 자신이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지나친 자기비판으로 원고를 폐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가족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필자에게 전했다.

  오토의 부인 귀스텔(Güstel) 여사가 1974년 10월 23일자로 보내준 편지에 의하면 그 동안 남편이 뇌출혈로 인해 고생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오토와 협의 끝에 묘소관리를 1975년 이후에는 필자가 맡기로 하고 1974년 12월 10일 소정의 양식에 서명하여 그래펠핑 시청 묘소 담당관에게 제출하였다. 오토는 서류상으로는 1975년부터지만 7년분, 즉 1982년까지는 자신이 부담한다고 하였다. 그 진술(약정)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진 술 서

본인은 1950년에 매장되어 있는 이미륵 박사(이의경) 묘소(K 1 30)
이용권
자로서 1975년(82)에 종료되는 이용권을 포기하여
정규화에게 양도하며,
이에 그 명의변경을 신청합니다.

포르더힌델랑, 1974년 12월 10일

오토 자일러 (서명)

Dipl. Ing. Otto Seyler

8973 Vorderhindelang

Schwandenweg 15

 

  그리하여 서류상에는 1950년 3월 24일부터 1975년 3월 24일까지는 오토 자일러가 묘소 관리비를 지불했고, 1975년 3월 24일부터 2005년 3월 24일까지는 정규화가, 2009년까지는 신윤숙 교수가 지불했다고 돼 있고, 그 이후의 비용은 유족대표 이영래 회장이 지불하였다고 들었다.

  자일러 교수의 딸 베르타(Berta)는 1972년 10월 31일 소설같이 긴 편지를 필자에게 보내줬지만 자료나 사람을 찾는 데 큰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자기도 오빠처럼 대학생활과 직장 때문에 집에 있는 기간이 별로 없었으며 ‘이미륵과는 한집 식구처럼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무슨 자료를 별도로 보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갖고 있는 자료는 《압록강은 흐른다》와 《무던이》가 실린 잡지, 그리고 사진 몇 장뿐이라는 것이었다. 잡지에 실렸던 글들은 받아는 보았으나 당시에 별도로 정리하여 보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항상 이미륵 옆에 있으며 도와드린 분은 1958년에 별세한 자신의 어머니(알리체 여사)였으며,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필자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 도움이 될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베르타가 기억하는 이미륵 주위의 사람들은 김재원 박사, 리나 자이처, 에파 크라프트, 옛날 하숙집 할머니 라우멘(Laumen) 여사,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 화가였던 구텐존 형제(브루노, 에두아트), 작가로는 봘데마르 본젤스(Waldemar Bonsels,1880~1952), 에른스트 비허르트(Ernst Wiechert, 1887~1950) 등이라고 하였다.

  불행히도 이 두 작가는 이미륵과 비슷한 시기에 별세하였으므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이외의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타계하였다고 전해주었다. 언제고 슈투트가르트 근방에 오는 일이 있으면 꼭 한번 만나서 직접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으나, 그 만남이 끝내 성사되지 못하여 마음에 걸려 있다. 1999년 이미륵 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때에 고령이 된 베르타를 뮌헨으로 초청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 베르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라는 말을 헬레네 군데르트(Helene Gundert) 할머니 편에 듣고 위로의 편지와 독문 유고집 두 권 (《Vom Yalu bis zur Isar》와 《Der andere Dialekt》)을 보내드렸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0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