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름 샬러 박사 (Dr. Anselm Schaller)

 

  이미륵 박사의 뒤를 이어 1955년부터 1974년까지 뮌헨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담당한 사람은 안드레 엑카르트 (1884-1974) 교수였다. 엑카르트는 1909년부터 약 20년 간 분도회 신부로 한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언어, 종교, 무속, 미술, 동화, 문학사, 교육제도, 속담, 음악, 요업, 인삼 등에 관해 연구하고 40 여편의 글과 저술을 남겼다. 그는 독일인으로서 한국에 관한 저서가 가장 많은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미륵과 엑카르트는 뮌헨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으며 한국학에 관한 대화도 서로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슈타른베르크호(湖) 근교에 살던 엑카르트 교수에게 이미륵과 교류가 있었던 분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슈투트가르트대학교 지리학과에 봉직하던 헤르만 라우텐자하 교수(Prof. Dr. Hermann Lautensach)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라우텐자하 교수는 뮌헨에 있을 때 이미륵을 만나 한국 지리와 역사에 관한 토론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술 “한국. 국가, 민족 그리고 운명”(Korea. Land, Volk, Schicksal)은 1950년 쾰러(Koehler)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이 책은 “삼가 이미륵을 회고하며”라고 헌정되어 있는 귀중하고 의미있는 책이다. 우선 출판사에 이 책을 주문하였더니 책이 이미 절판되어 결국은 고서점을 통해 구할 수 있었다.

1972년 9월 22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라우텐자하 교수에게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더니 10월 20일 부인에게서 회신이 왔다. 자기 남편은 1년 전 (1971년)에 별세하였고, 그 동안 두 번이나 이사하면서 많은 자료들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자신도 뮌헨에서 공부할 때 이미륵을 알고 있었으며, 자기 남편과도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면서 집에서 자료를 뒤적이다가 찾은 ‘부고’, 남독신문과 뮌흐너 메르쿠어(Münchner Merkur)에 실렸던 ‘신문부고’들, 라인 넥카르 차이퉁 (Rhein-Neckar-Zeitung)에 실렸던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평들을 10월 24일 필자에게 보내주었다.

아울러 이미륵의 뮌헨대학교 동물학과 동창 두 명의 주소를 적어 보냈다. 한 명은 안젤름 샬러 박사 (Dr. Anselm Schaller)였고, 또 한 사람은 잉에보르크 자르토리우스 박사(Dr. Ingeborg Sartorius)였다. 그리고 잉에보르크의 숙모인 가브리엘레 벡커(Gabriele Wecker) 할머니의 주소도 함께 알려 주었다. 1982년 국내의 분도출판사에서 독문으로 발간된 유작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Vom Yalu bis zur Isar)의 일부분은 이 할머니가 사망한 후 짐 속에서 나온 자료로서 (잉에보르크의 제부인 에른스트 뢰슬레 박사 (Dr. Ernst Roesle)가 짐을 정리하다가 발견하였다고 함) 1975년 5월 27일 샬러 박사를 통해 필자에게 전달되었다. 왜 그 원고뭉치가 이 할머니댁의 장농에 숨어 있었는지, 그것은 수수께끼로서 아직껏 아무도 모르고 있는 일이다.

라우텐자하 여사의 편지를 받고 전화 번호부에서 샬러 박사의 번호를 찾아 즉시 연락하여 다음날 (10월 21일) 뮌헨대학 본관 앞에서 잠시 만난 바 있었다. 그는 이미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라우텐자하 여사로부터 필자의 소식을 들어서 용건을 알고 있었기에 긴 설명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3일 후 (10월 24일) 안젤름 샬러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지난번에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안되어 잠시 만나고 헤어졌으니 - 행길에서 유고 원고만 주고 받았으므로 - 다시 찾아 뵙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1972년 10월 28일 우리를 뮌헨의 빅토리아슈트라쎄 26번지 (Viktoriastrasse 26)에 있는 자택으로 초대하였다, 자녀들은 모두 출가하고 70세 쯤 되어 보이는 두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간 - 이미륵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 한국인을 만난지 20년이 넘는다면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샬러 박사는 1925년도 뮌헨대학교 동물학과에서 이미륵을 처음 만나 학교수업을 함께 받으며, 실험실에서도 거의 매일 만나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학교로 가는 길에 영국공원 (뮌헨 시내에 있는 공원명)을 지나가다가 아침식사도 못하고 벤취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미륵을 만나 함께 간단히 식사하고 얘기를 나눈 일이 기억난다고 하였다. 그때 이미륵은 뮌헨에 온지도 얼마 안되어 아직 대학의 분위기도 잘 모르고, 또 지도교수도 정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함께 빌헬름 괴취(Wilhelm Goetsch) 교수를 찾아가 소개하였다고 한다.

샬러 박사는 이미륵이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그곳에서 같이 공부하던 자르토리우스와 함께 뮌헨대학교로 전학하였다는 말을 들은 바 있으며, 어떤 연유로 두 사람이 함께 대학을 옮겼는지는 잘 모르지만 준비가 부족한 전학이었던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뮌헨으로 전학하고 2년 후, 즉 1927년, 이미륵은 박사학위 논문 준비, 실험 등등으로 매우 바빴을텐데도 이극로, 황우일, 김법린 등과 함께 브뤼셀에서 개최되었던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한국 대표단은 세계피압박민족대회를 대비하여 총 12쪽 분량의 “한국문제 (The Korean Problem)"라는 소책지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제목을 각각 달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컬러로 된 두 태극기를 교차해 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게 제작된 ”The Korean Problem"은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와 기자들에게 강압적인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식민지 한국의 참상 등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인쇄되었던 것이다.

이 인쇄물을 이미륵이 브뤼셀에서 독일에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보냈으며, 그 책자를 받은 샬러는 그것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1972년 10월 28일 필자에게 선물로 주었다. 필자가 귀국하고 몇년 후에 국내에서 독립기념관 자료수집 운동이 열을 올리고 있었을 때 필자는 이 귀중한 원본 자료를 독립기념관의 요청으로 1984년 7월 13일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이 인쇄물의 하단에 이미륵은 연필로 “Brüssel, 10. Feb.'27" 라는 발신일자를 적어 놓았고, Mirok이라고 서명까지 하였다.

당시에 샬러 박사는 로자(Rosa)라는 이미륵의 여자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아 투병 중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고 하였고, 이미륵 자신도 그때쯤 건강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브뤼셀을 다녀온 후 그는 결국 의사의 지시에 따라 1927년 6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3개월 동안 스위스의 아그라 요양소(Sanatorium Agra)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때 쯤 안젤름 샬러는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중에 입원 중인 미륵을 방문한 바 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 앞의 베란다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샬러라는 날씬하고 적당히 그을은 얼굴에 반짝이는 회색 눈의 동창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하여 젊은 부인을 데리고 신혼여행 차 스위스를 지나다가 여기에 입원하고 있는 자기의 외로운 친구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미륵: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정규화 역, 범우사, 2000년, 274쪽)

 

1973년 4월 어느 날 또 안젤름 샬러 박사의 초대를 받았다. 자기가 옛날 이미륵과 친하게 지내면서 한국과 관계되는 귀중한 책 한 권과 종이에 쓴 글을 (샬러 박사의 누님이 이미륵으로부터 받은 선물) 갖고 있다고 하였다. 백지에 펜으로 쓴 글은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 Wer die Welt mit Liebe betrachtet, dem verwandelt sich die Dornhecke zum Rosengarten"는 내용이었고, 밑에는 ”한국인 이미륵 (Mirok Li aus Korea)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샬러박사는 이것을 필자에게 선물하였다. 같은 날 소중한 희귀본 한 권도 선사받았다. “안구스 하밀톤: 한국, 아침놀의 나라, 1904” (Angus Hamilton: Korea. Land des Morgenrots, 1904)라는 책에 "정규화씨에게, 진심어린 애정으로“ (Herrn Chung in herzlicher Verbundenheit)라고 헌정문까지 써서 주었다. 발간된지 무려 106년이나 되는 이 책의 중요 목차는 대략 다음과 같다. “1장: 해안에서, 나라인식 부족, 미신과 신앙, 간추린 역사 2장: 자연의 특징, 발전, 개혁과 복지의 징후, 제물포, 인구, 거주, 상업 등등”이 담긴 내용으로서 한국 전체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1974년 2월 7일에는 “노버트 베버: 한국의 금강산, 1927” (Nobert Weber: 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1927)을 선물로 주면서 “충심으로 우정을 전하며, 정규화씨에게” (Herrn Chung in herzlicher Freundschaft weitergereicht)라고 헌정문을 써주었다. 장안사, 사찰들, 구룡포 등이 소개되었고 사진까지 실린 83년이나 되는 희귀본이다.

안젤름 샬러 박사에게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그는 이미륵이 평소에 구상하고 있었던 작품 계획에 대해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I. 부: 한국에서의 유년시절 (Jugend in Korea)

II. 부: 서양과의 만남 (Begegnung mit den Westen)

III. 부: 서양과 서양 (Westen mit Westen)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작품을 구상 중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바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륵은 건강이 많이 나빠진 후에 샬러를 찾아 와 “세상이 지금 제삼제국을 욕하고 있기 때문에 2부를 출판하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말을 직접 들었고, “원고를 소각했어”라는 말도 들은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필자는 샬러 박사를 가끔 만났고, 연말마다 집으로 초대를 받았으며, 1976년 귀국 후에도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1977년 3월 24일자 편지에는 “머나 먼 한국으로 떠난 당신과 당신의 부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슬픈 일입니다. 모쪼록 한국생활에 빨리 적응하기를 바랍니다. 뮌헨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서울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요?”라는 안부와 더불어 자신이 언젠가 이미륵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뒤늦게 찾았다며 보내 주어 감사히 받아 잘 보관하고 있다. 내용 중에는 벨기에 어느 대학 조교로 근무하던 김재원 박사를 방문한 얘기도 있었다. “친애하는 암젤, (......) 약 1개월 전에 나는 안트베르펜에서 어느 독일계 벨기에인의 조교로 있다가 이제 조국으로 귀국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동양인(김재원 박사를 의미함)을 방문하기 위해 그곳을 다녀왔어. 이 벨기에의 고고학자이자 예술사가는 내게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보여줬고, 나로 하여금 많은 새로운 귀중품들을 보고 감동하게 하였어. (......) 1936년 성탄절, 자네의 미륵”.

생각하면 이미륵이 뮌헨에서 보낸 대학생활을 필자에게 세세히 전해준 사람은 안젤름 샬러 박사 뿐이다. 1976년에 마지막으로 헤어졌으니 세월이 어느덧 34년이나 흘러버렸다. 살아계시면 할머니와 함께 100세도 넘었을텐데, 소식이 궁금하고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죄송할 뿐이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