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볼프강 바우어 교수 (Prof. Dr. Wolfgang Bauer) (1930-1997)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 이미륵의 제자인 볼프강 바우어 교수가 정교수로 봉직하고 있다는 말은 뮌헨에서 공부하는 선배 유학생들로부터 가끔 들은 바 있었다. 한번 뵙고 싶어서 몇 차례 면담을 시도하였으나 비서실의 이야기가 교수님이 교환교수로 해외에 나가 연구 중이라고 하여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볼프강 바우어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1월 23일, 교수면담 신청을 하고 동양학부 연구실에서였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동양학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대에 계시는 고병익 교수를 잘 기억하고 있다면서 매우 기뻐하였고,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바우어는 1930년 독일 할레 (Halle)시의 기독교 가문에서 출생, 뮌헨대학교에 입학하여 1953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966년 36세 때부터 뮌헨대학 한학부에서 약 30년 간 강의하며 많은 유수한 제자들을 배출시킨 돋보이는 한학자이다. 그는 이미륵의 한학과 제자 중 학문적 업적이 많아 명성이 가장 높았던 학자라는 것은 학계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평생 그가 쌓은 학문적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정부로부터 그에게 1 목사의 아들인 그는 1948년도에 뮌헨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려는 꿈을 품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미륵은 1948/49년 겨울학기에 ‘한국어’, ‘동아시아 문학’, ‘장자’를, 그리고 1949년 여름학기에 ‘한국어’, ‘동양문학’, ‘츠레츠레구사’ 세 강좌를 개설하여 뮌헨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무더운 여름 어느 날 그가 동양문학을 열강하고 있었던 때의 일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강의실 문門을 조금 열어놓고 있었을 때 복도를 지나가던 바우어 학생이 우연히 강의실을 들여다 당시에 뮌헨에서 함께 한학을 공부한 사람은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봉직하다가 몇 년 전에 별세한 귄터 데본, 많은 학문적인 도움을 받았고, 이미륵을 만년에 간호하며 옆 자리를 지켜주었던 에파 크라프트 박사 등이었다고 한다. 당시 뮌헨에서는 에리히 해니쉬 교수가 주임교수였고, 베어링어 박사와 프랑케 박사는 조교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사이로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이미륵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조교로 알려져 있었으며, 해박한 실력가로서 명강의를 하였다고 바우어는 전하고 있다. 특히 이미륵은 한문과 동양문화와 더불어 별도로 서예까지 지도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학생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그래펠핑까지 가서―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볼프강 바우어 교수 자신도 물론 이미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1960년대 말경 뮌헨대학교에 ‘한국학과’ 개설 움직임이 있었을 때 같은 동양학부에 속했던 주임부장 볼프강 바우어 교수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학 본부 및 교육부와 접촉을 가지면서 ‘한국학과’ 설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공교롭게도 보쿰(Bochum)대학에서 브루노 레빈(BrunoLewin) 교수가 주관하여 학과를 신설함에 따라 뮌헨대학교에서의 ‘한국학과’ 설립이 무산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당시 뮌헨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안드레 에카르트는 정교수가 아닌 강사였으며, 너무 연로한 학자였다는 것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뮌헨대학교에 중국학과와 일본학과는 엄연히 개설되어 있는데 ‘한국학과’가 없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로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대단히 가슴 아픈 일로 남아 있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바우어 교수가 동양학부에 중국학과와 일본학과에 이어 ‘한국학과’도 개설해 보려고 시도했던 것은 역시 은사 이미륵의 학문적 업적과 명성을 기리며 한국문화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우어 교수와 친분이 있었던 김재원 박사의 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탐구당, 2000)을 보아도 ꡒ뮌헨대학의 바우어 교수 같은 이는 그의 영향을 받아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돼 뒤에 중국철학을 공부했다ꡓ(268쪽)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50년 3월 20일 이미륵이 서거하자 바우어 교수는 자일러 여사와 에파 크라프트를 찾아 가 비석을 준비하는 문제와 장례식 절차 등을 의논하였다고 오토 자일러는 전하고 있다. 김재원도 “(......) 바우어 교수는 뮌헨 교외에 있는 이미륵의 묘비에 한문으로 비석碑銘을 직접 쓰기도 했다”고 전한다. (자서전,《박물관과 한평생》, 268쪽). 결국 첫 번째 비석에 새긴 고인의 성함(李儀景 Dr, Mirok Li, 1899~1950)은 바우어가 한자로 썼다고 하니 당시에는 물론 한자로 쓸 수 있는 사 볼프강 바우어가 남긴 유명한 저서로는 학생시절 이미륵의 영향을 받고 집필하였다는 두 권의 유명한 저서가 있다. 하나는《중국과 행복에 대한 기대. 중국의 정신사 속에서 본 낙원, 유토피아와 이상관념(China und Hoffnung auf Glück. Paradiese, Utopien. Idealvorstellungen in der Geistesgeschichte Chinas)》 1974년 필자가《압록강은 흐른다》의 판권을 인수받고 독일에서 3판을 피퍼출판사에서 다시 출간할 예정이었을 때 피퍼 사장이 “만약 볼프강 바우어 교수가 《압록강은 흐른다》의 새로운 출판을 위해 서문을 써준다면 출간할 용의가 있다”고 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바우어 교수는 학술연구차 해외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연락이 어려워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므로 매우 아쉬웠다. 그래서 그 책이 결국 EOS출판사에서 서문을 싣지 못한 채 필자의 후기만 싣고 출간되었으나, 바우어 교수가 별세하기 1년 전인 1996년에 어렵게 부탁하여 그가 알찬 서문을 써주어 호화판 장정으로 책이 출간되어 현재도 독일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다. “이미륵은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었다. (......) 그는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피할 수 없이 서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불교의 근본 문제를 항상 깊게 생각하였으며, 특히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 그러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문). 이미륵은 한국과 독일을, 혹은 동아시아와 유럽을 서로 연결하고 중재하는 대표적인 문화사절이었다고 바우어는 평하고 있다. 이미륵에게서 배운 독일 제자들은 하나 같이 “한국어, 특히 중국문학과 철학, 또한 서예 스승으로 뿐만 아니라 개성있는 선비”로 이미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오래도록 기억한다고 하였다. 1987년과 1989년경에는 출판사 문제와 《압록강은 흐른다》의 재판 문제 등으로 EOS출판사와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할 때 출판법 문제에 관해 도움을 받은 바 있으며, 1995년 11월 17일 필자가 뮌헨대학 연구실에서 바우어 교수를 만났을 때 이미륵 묘소 영구보존 문제로 고민을 하자 바우어 교수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즉석에서 그래펠핑 시청 묘소 담당관(침머만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관리비를 맡고 있는 정규화 박사와 연락이 두절되거나 혹시 그가 별세하 이미륵의 뮌헨대학 한학과 제자가 학문적으로 성장하여 명성이 높은 교수가 되었으며 널리 알려진 한학자가 되었다는 사실, 그것은 독일에 사는 교포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동양 학자들과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도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2) 귄터 데본 교수 (Prof. Dr. Günther Debon) 뮌헨대학교 독문학과 헤르베르트 괴페르트 교수는 독일에서 동양문화 분야의 학자들과 교분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0월 24일 면담시간에 알려준 사람 중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 중국학과에 재직 중인 귄터 데본 교수와 미술학부 디이트리히 젝켈 교수도 있었다. 데본 교수도 1948년 경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볼프강 바우어, 에파 크라프트 등과 함께 중국학을 공부하고 다년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봉직하며 젊은 학자들을 배출시킨 한학자이다. 연락처 주소(Am Hans 이미륵은 서예지도 시간에 당시唐詩를 많이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도 각별히 고향을 그리며 향수를 달래보는 시들에 주목하였던 것이 눈에 띈다. 유고 뭉치에서 성당盛唐의 시인으로서 당시에 두보杜甫와 쌍벽을 이루었던 이백李白의 정야사靜夜思에서 1,2행은 보이지 않고 3,4행만 찾았으므로 여기에 첨부하며 그 전체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정야사靜夜思
牀 前 看 月 光 침실로 스며드는 달 그리매 疑 是 地 上 霜 어찌보면 서리가 내린듯도 하이 擧 頭 望 山 月 산 위에 뜬 달을 바라보고는 低 頭 思 故 鄕 머리 숙여 먼 고향을 생각하노라. 연이어 발견된 또 다른 시는 왕유王維의 잡영雜詠 중 1,2행으로서 역시 외로운 잡영雜詠 君 子 故 鄕 來 그대 고향에서 돌아왔거늘 應 知 故 鄕 事 응당 고향 일을 알으렸다 來 日 倚 窓 前 올 무렵 우리집 창 앞엔 寒 梅 著 花 未 하마 매화꽃이나 피었던가 귄터 데본이 1958년 피퍼출판사에서 발간한 《당시 역서(Herbstlich helles 데본 교수가 어느 날 대화 중 이미륵에게 그토록 어렵게 한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독일에서도 계속했던 의학공부를 왜 갑자기 중단하고 동물학으로 전과하였느냐고 물었더니 “독일 의과대학 재학시절 수술실에서 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의료진이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별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을 보고, 의학이라는 학문의 냉혹성에 회의를 느낀 적이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이미륵이 의학공부를 중단한 원인이 아닌가 추측한다고 하였다. 당시의 정보를 데본 교수를 만나 직접 듣고 싶었으나 거주하는 곳이 가까운 곳이 아니어서 찾아뵙기가 어려웠다. 간혹 전화라도 하면 강의 중이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데본 교수 자신은 사진 한 장과 서예지 몇 장밖에 소장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하였고, 이것들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면서 보내주지 않았다. 그 후 편지 왕래와 전화 통화도 가끔 있었으며, 1999년 ‘이미륵 탄생 100주년기념’ 기사 취재 때에도 우리 방송진을 집에 불러 옛날 뮌헨에서 공부하던 때의 얘기를 전해주었고, 많은 도움을 주어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1999년 6월 16일 KBS에서 방송된 수요기획 ‘독일에 흐르는 압록강(이미륵의 흔적을 찾아서)’의 맨 앞부분에서 귄터 데본 교수의 생전 모습을 영상 화면에서 잘 볼 수 있다. 흥미있는 증언뿐만 아니라 옛날을 회상하는 얘기를 전해주는 정겨운 장면이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6월호
등 연방십자 훈장까지 추서되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호평과 그의 명성을 입증하고 있다.
보았더니 낯선 동양 사람이 생소하게도 독일어로 열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 자연과학부나 공과계열 쪽은 몰라도 철학부 같은 분야에서 강의하는 동양인은 극히 드믄 일이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바우어는 문을 조용히 열고 강의실에 들어가 빈 자리에 앉아 그 강의를 끝까지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도대체 이런 일도 있을까! 바우어는 그 강의 내용에 너무나 매료되어 그 다음 주에도 다시 도강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중국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다음 학기에는 심지어 전공을 ‘의학’에서 ‘한학’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바우어 교수가 뮌헨에서 교포들에게 전한 말). 너도 나도 의학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독일에서 낯설고 생소한 한학을 선택한 것은 대단히 놀랍고 이례적인 일로 보인다. 순식간에 바우어는 이미륵의 차분하고 알찬 강의내용에 매료되어 운명적인 한학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륵은 “서예가요, 의학도이자, 한학자, 작가, 철학자”라고 평하고, 특히 그의 온화한 선비정신과 넘치는 인간미는 주위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그가 만나는 소박한 서민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바우어는 이미륵이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웃을 사랑하며, 매사에 섬세하고 공자와 맹자를 숭상하는 전형적인 동양 학자였다고 한다. 제자들의 눈에는 이미륵이라는 존재가 ‘은은히 빛을 발하는 등불’ 같은 존재였으며, 이러한 선비적이며 인간적인 면모는 제자들과 자신에게 항상 감
동적이었다고 한다. 바우어는 뮌헨에서 필자를 만날 때마다 이미륵을 위한 행사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을 때 공식적으로 추진해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의논 끝에 볼프강 바우어 교수가 주관하는 강연회가 늦었지만 필자가 마침 뮌헨에 체류하는 기회에 1987년 7월 16일 뮌헨대학 동양학부 4호 강의실 (Kaulbachstrasse 51a)에서 개최되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모두에 그는 모임에 참석한 청중들에게 강연회를 주관하게 된 경위와 이미륵의 학문적 업적이며 인간미를 소개하였다. 필자의 강연 제목은 ‘이미륵의 생애와 작품’이었고, 청중은 관심있는 한국 유학생들과 독일학생들, 대학에 계신 교수분들, 동양학부에 근무하는 직원들, 생전에 이미륵과 친분이 있었던 리나 자이처 할머니, 힐데 볼게무트 여사 등등이었다. 매우 연로하였던 자이처 할머니와 볼게무트 여사는 뮌헨 교외의 가우팅과 그래펠핑에서 지하철을 타고 그 먼 길까지 찾아와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심지어 필자의 지도교수인 독문과의 헬무트 모테카트 교수와 카알 슈토커 교수까지 청중석에 앉아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러나 에파 크라프트는 서면으로 안내장을 보냈는데도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참석하지 못해 매우 아쉬웠다. 그리고 바우어 교수는 뮌헨에서 한국인 교포들의 모임에도 초청하면 사양하지 않고 참가하여 이미륵과 함께 지내던 옛날 얘기를 조용히 해 주어 퍽 고마웠다. 더구나 남아있는 편지나 무성 필름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미륵의 억양이나 독일어 발음에 대해서도 실감나게 설명하여 주었고, 담배를 즐기던 모습까지 보여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람이 주위에 별로 없기도 하였겠으나 바우어가 제자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 생각된다.
(München 1974)과 또 하나는 30년간이나 집중하여 썼다는 마지막 저서 《중국의 모습(Das Antlitz Chinas)》이다. 수천 년의 역사와 철학, 전통문화, 문학을 통한 중국의 모습과 미래를 그려낸 역작들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무정부주의를 위한 정열”로 가득 찬 선비라고 보는 제자들과 학자들도 있다.
게 되면 뮌헨대학교. 뮌헨, 카울바하슈트라쎄 47번지, 볼프강 바우어 교수에게 연락하십시오. 전화: 331254 또는 21802362).” 이 정도면 바우어 교수가 은사인 이미륵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음을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1996년 여름 필자가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지인들로부터 그가 병석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듣고 그가 빨리 쾌차하기를 기원하였으나 1997년 1월 14일자 독일신문 (남독신문)에서 그가 별세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은 바 있다.
Thoma-Platz 44)를 받고 1972년 12월 28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편지를 보냈더니 3주가 지난 1973년 1월 17일 회신이 왔다. 이미륵 박사를 회상할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는 내용, 자신이 중국문학과 친근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이 운이 좋게도 바로 이미륵이었고, 그리고 서예의 대가였던 이미륵으로부터 -주로 그래펠핑에서- 서예지도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서예지도를 받는 것은 이색적이면서도 친근감이 가는 공부였다고 하였다. 서체
의 예술적 형상과 글자 하나하나가 풍기는 의미와 미학에 집중하면 누구나 도취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이국땅에서 향수를 달래며 살았던 시기의 흔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Leuchten überm See. Gewidmet an Mirok Li)》는 《삼가 이미륵에게 바치노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소중한 역서이며, 매우 의미있는 책이다. 이미륵으로부터 당시唐詩를 철저히 배울 수 있었던 뮌헨대학 학생시절을 회상하면서 고마운 뜻을 잊지 않고 스승에게 감사를 전하며 바치는 역서로 보인다. 대학에서 공부한 분야 중 특별히 당시에 전념하게 된 것도 오로지 은사 이미륵의 덕이라고 말한 내용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고맙게도 그 역서를 우편으로 필자에게 선물로 보내주어 보관하고 있다가 지금은 그 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